제51집: 자녀의 날과 그 사명 1971년 11월 1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11 Search Speeches

자녀의 이름을 가질 수 있" 자격자가 되려면

그러면,자녀의 날과 그 사명은 무엇이냐. 오늘날 타락한 인류를 바라 보시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그 하나님이 찾는 사람, 하나님이 만나고 싶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이냐? 타락하여 눈물을 흘리던 아담 해와와 같은 사람일 것이냐? 그 눈물은 누구를 위하여 흘린 눈물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그들은 잘못된 눈물을 흘렸으니 이제는 좋은 눈물, 정상적인 눈물을 흘려야 되겠다구요. 자기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세계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후손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자기 일대를 위해서 눈물 흘리고, 자기 일대의 행복을 찾아가다가 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기 일대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 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자녀의 날을 맞는 의의를 다짐하게 될 때. 여러분이 자녀가 되고 싶다면 어떠한 자리에 서야 되겠느냐?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느냐? 하나님이 하신 수고 앞에 대신 수고하기 위해 사지가 찢기우는 길이라도 찾아가려고 발버둥이쳐 봤느냐? 못 해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라는 그 자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런 공적인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서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인 나를, 혹은 우리 조상을 잃어버렸을 때 당신의 마음에 얼마나 슬픔이 사무쳤습니까? 또한 그 후손을 통하여 지금까지 역사과정에서 당하시던 수욕과 고통과 극난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라고 위로해 드리면서 무한히 동정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권한으로 온 세계와 사탄까지도 심판해 버릴 수 있는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지지리 수고하는 입장에 서서 손을 댈래야 댈 수 없고, 하나님 자신이 가져야 할 환경을 갖지 못한 채 고독단신으로 사탄 앞에 참소받고 사탄세계에 발판을 몽땅 빼앗겨 가지고 신음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게 될 때,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동정하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느냐? 문제는 여기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사적인 눈물을 버리고 후손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공적인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대해 나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자녀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자격자가 될 것이 아니겠느냐? 자녀로서의 자격을 가져야만 자녀의 날을 축하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간이 매일 눈물만 흘리고 살 수 있겠어요? 안 그래요? 그런데 인간이 눈물을 흘리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 우리 통일교회 원리가 가르쳐 준 것과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게 된 동기는 자기들 멋대로 사랑의 길을 찾아가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부모 친척이 다 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아들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나가서 행동하다가 잘못하게 되면. 누구도 거기에 대해 절대로 보장을 안 해줍니다. '이놈의 자식 같으니라구. 네 멋대로 하더니 꼴이 잘 됐다' 하며 눈앞에 얼씬도 못 하게 하고 쫓아냅니다. 그렇지만 부모가 거들고 일가 친적, 동네 전체가 거들어서 결혼을 시켜 뒀는데도 불구하고, 만일 결과가 좋지 않게 됐다 할 때는 그의 어머니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서러움을 당하게 될 때는 나보다 먼저 울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먼저 울어 줄 것입니다. 혹은 삼촌이나 사촌, 친척들이 전부 다 동정할 것입니다. 자, 여러분 어떤 것이 지혜로운 것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원칙을 따라서 움직여야 됩니다. 원칙을 따라서 움직이는 입장에 섰다 하게 되면 아무리 외롭더라도, 아무리 외로운 자리에 섰더라도 자신의 울타리가 자기를 사랑해 줍니다. 그렇지요? 내 사랑의 울타리가 외로움에 비례하여 환경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다시 소생하는 것입니다.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하는 데도 옛날보다 못한 자리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자리로 부활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외로운 자리, 슬픔의 자리, 당장 깨질 것 같은 자리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거기에는 큰 사랑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혼자 멋대로 할 때에 사랑이 있어요? 사랑의 환경이 있어요? 없다는 거예요. 사방을 둘러봐도 살풍경이라구요. 전부 다 저주하고 원망하게 되어 있지, 동정받는 환경을 못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언제나 동정적 환경을 생각하면서 가려 가는 것입니다. 동정 가운데는 물론 역사적인 선조들의 동정도 동정이지만 하나님의 동정, 사회의 동정, 혹은 후손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인연을 갖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 같은 양반은 그렇게 살다 간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