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집: 찾으시려던 예수님 1959년 10월 1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26 Search Speeches

하늘이 찾아 세우려" 예수의 식구

역사적인 예수의 심정을 모르던 그 때의 사도들은 예수를 배반하였습니다.

역사적인 뜻을 가지고 움직이는 예수를 그들은 배반하였습니다. 미래의 뜻을 품고 움직이는 예수를 모르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배반의 역사를 가로막고 청산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친동생이 되어야 하고, 예수가 사랑할 수 있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와 영원무궁토록 같이 살 수 있는 식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거든 예수와 더불어 싸움터에 나가 싸울 수 있는 백성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아십니까? 이 시대의 하나님이 어떤 입장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는 배반의 역사를 되풀이할지도 모를 위험한 단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찾으셨습니다. 인간 앞에 예수를 보내시고 예수의 동생 될 자, 예수의 식구 될 자를 찾으셨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바라셔서 4천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요셉 가정은 예수를 사랑하고, 죽든지 살든지 그 뜻과 더불어 살아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가기 전에 신부급에 도달해 있어야 했는데 못 되었습니다. 그의 동생들 가운데에도 예수가 어디가게 될 때 `형님, 어디 가십니까? 제가 가지요' 하는 동생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어떠했어요?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했습니다.(요7:1-9). 또 세례 요한은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그 분의 머리 위에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거를 하고도 `주여! 어디 가서 어떻게 사시렵니까? ' 하고 물어 보았어요? 제자들이 물어 보았어요? 유대교인들이 물어 봤어요? 택함 받았다는 이스라엘 민족이 물어 봤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말할 수 없는 한을 품고 갔습니다.

이 한을 푸는 날이 끝날이요, 풀지 못한 한을 청산하는 날이 심판날입니다. 심판날에 남아지고자 하는 여러분, 마음을 헤쳐 놓고 냉정한 입장에서 비판해 보십시오. 나는 하늘이 찾고자 하는 그 예수를 찾을 줄아는자가 되었느냐. 예수가 맞이하고자 하는 천국가정, 아니면 그 이념국가의 백성이라도 될 수 있는 자격자냐. 나아가서는 신부, 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사랑하는 직계의 아들 딸이 되었느냐. 신부가 못 되면 아들 딸이 되고, 아들 딸이 못 되면 형제가 되고, 형제가 못되면 식구가 되고, 식구가 못되면 종족이 되고, 종족이 못되면 민족이 되고, 민족이 못되면 그 국가의 백성이라도 되어야 할 게 아닙니까?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품고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이신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길을 가고 있고, 또 그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다. 역사노정에 없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에 없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령한 사람들이 체험하지 못하는 사실들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목적은 주가 땅 위에 오실 때에 그의 품에, 혹은 그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식구가 되고 종족이 되고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 위하여 모인 무리입니다.

예수 앞에 제일 가까운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이 누구뇨? 신부요 형제요 자녀인데, 이를 통틀어 말하면 식구입니다. 예수의 식구인 것입니다. 예수의 식구. 이는 하나님이 고대하던 식구요, 이는 예수가 찾으려 하던 식구입니다. 이 식구를 땅 위에 세워 놓은 것이 역사적인 소원이거늘, 그 소원을 풀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의 형제, 아니면 예수의 자녀가 되든지, 아니면 예수의 신부가 되든지, 아들 딸이 되든지, 아니면 적어도 종족권내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14만 4천 무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14만 4천무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쌍한 하나님,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불쌍한 우리의 선조들이었습니다. 죽고 또 죽어갔지만 해원의 한날을 갖지 못한 선조들, 해원의 한날을 잃어버린 이 땅, 해원의 한날을 알지도 못하고 죽으면서 따라나온 선조들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모든 슬픈 사실들을 알아가지고 찾으시던 예수, 세우시려던 예수, 모시고 싶었던 예수를 모실 수 있는 그런 자리까지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섭리노정을 따라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보면 이민족은 불쌍한 민족이었습니다. 불쌍한 이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세계 사조는 이 민족을 걸어 놓고 뒤넘어쳤습니다. 또 오늘날은 기독교계가 이 민족을 걸어놓고 뒤넘어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