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집: 우리의 인연 1968년 11월 1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15 Search Speeches

세계 복귀를 위해서" 자기 희생이 필"하다

이렇게 볼 때 통일교회는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한없이 슬픈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을 가르쳐 주어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으로 함께 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으로 출발한 역사를 짊어지고 복귀를 향하여 개인적인 슬픔, 가정적인 슬픔, 종족적인 슬픔, 민족적인 슬픔, 국가적인 슬픔, 세계적인 슬픔, 천주적인 슬픔을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외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려면, 온 세계에 벌어져 있는 슬픔의 요소를 전부 없애야 하는데 그 책임을 누가 지느냐? 그 책임을 미국이 못 지면 한국이 져야 되겠습니다.

오늘날의 월남전쟁을 비롯한 세계의 심각한 사건을 중심삼고 미국 국민의 여론이 뭐 어쩌고 저쩌고 한다고 해서 주권자가 후퇴하면 망합니다. 세계는 어디로 가느냐? 인류 역사가 후퇴한 뒤에 어떤 방향으로 수습될 것이냐? 이것을 갖추지 못하면 그때는 정말 망합니다. 소련 공산당도 그렇지 못하면 망합니다.

그러면 흥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가시는 섭리의 방향을 중심삼고 일치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세계적인 모든 슬픔을 품고 세계를 대신해 자기들이 상처를 받고, 세계적인 슬픔을 책임지고 죽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개의치 않고 나설 수 있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민족이 설 땅이 없어 세계에 흩어지게 되더라도 그 민족이 남긴 사상이 남아 있는 한 그 사상으로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천운이 열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민족 문화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에 세계적인 기독교 국가라고 권위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슬픔의 세계를 책임질 수 있는 민족이 못 되면, 이 민족의 주권과 소망은 상실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이 아무리 국가의 주권을 갖지 못하는 처참한 자리에 있더라도, 거기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세계의 슬픔을 책임질 수 있는 국민성을 지니고 있으면 그 민족은 승리의 세계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한 승리의 세계를 개인이 고대하는 것이고, 가정이 고대하는 것이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는 것입니다.

외로운 목자의 생활을 하더라도, 혹은 방랑하는 종족이 되어 몰림을 받으면서 슬프고 한스런 생활을 하더라도 앞으로의 슬픔의 세계를 책임지겠다고 할 수 있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천년 만년 축복받을 수 있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민족은 결국 세계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민족 문화도 포기하고 민족의 주권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잃어버려도 좋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차지하기 위해서 편협적인 것과는 절연해야 합니다. 그런 관(觀)을 가진 무리가 있다 할진대, 그 무리는 기필코 어느 한 날에 결정적인 때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아이고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나서 죽게 되었다. 제자들이 배반해서 죽게 되었다' 혹은 `온 인류를 대표한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 못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땅이 책임을 못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임은 하늘과 땅의 책임이요, 한 시대만의 책임이 아니라 역사적인 책임입니다. 하늘 땅이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는 외로운 것이었습니다. 그 책임을 다 저버리고 다시 닦으셨으니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땅이 짊어진 책임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마26:39)' 할 때의 이 기도의 뜻은 주어진 한계내의 행복을 고대한 것이 아니라, 한 생애권내에서 누구보다도 세계 복귀를 바라는 마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와 우주를 위해서 고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뜻'과 `하나님의 뜻'을 보면 예수님의 뜻은 어떠한 한계권내에서 고대하고 싶어하는 뜻이지만 하나님은 그 한계선을 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서 세계를 염려하시는 아버지를 보게 될 때, 그 아버지의 마음 가운데 세계로 가야 할 고난의 심정을 품었음을 알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예수님은 절실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냐? 세계적인 복귀입니다. 세계를 살리려 했는데 죽음이 가로놓여 못 가게 되었기에 '내가 못 가더라도 후대 사람이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인연을 맺어 주겠다'고 하는 선포식이며 선언식을 한 곳이 바로 십자가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일면 패자의 입장에 섰지만, 하나님의 심정의 주체가 되어 고난과 슬픔을 점령하는 제일인자가 됐습니다. 그러면 슬픔을 점령할 수 있었던 기준이 무엇이냐?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출발할 수 있다고 하는 소망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통일교회는 동기의 인연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슬픔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냐? 하나의 방향, 해방과 통일의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목적이 둘이 될 수 없습니다. 목적이 추구하는 그 길은 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확실히 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의 기점을 같이해야지 이것을 달리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런 것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해주는 것도 그런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과 여러분은 어쩌면 갈라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서 그 기준이 맞지 않고는 함께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