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집: 통일의 무리 1970년 10월 1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38 Search Speeches

세상 죄를 지고 가야 할 통일의 무리

통일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올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머리에 임하며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막4:11)" 하셨고, 세례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고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홀로 서 있다 할지라도 세계적인 끝을 가야 합니다. 그러한 길을 가려면 세계적인 탕감의 제물의 과정을 거쳐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대신하여 개인적인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개인적 십자가뿐만 아니라 가정적 십자가까지도 지신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죄권에는 가정의 죄권이 있는 것이요, 종족의 죄권이 있는 것이요, 민족의 죄권이 있는 것이요, 국가의 죄권이 있는 것이요, 세계의 죄권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죄권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지, 개인의 죄만을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십자가도 지고 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제한된 환경의 죄의 집을 짊어지고 간 것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에는 세계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의 십자가를 책임질 수 있는 국가는 어떤 국가냐? 예수님이 이것을 못 이루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명을 담당할 수 있는 국가는 어떤 국가냐? 하나님은 이걸 찾아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계의 십자가를 대신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승리하지 않고는 새로운 국가를 형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인은 예수님보다 나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슴지 않고 담대하게 하늘 보좌 앞에 나가 논고를 펼 자격이 있습니까? 하늘의 공정한 법도에 따라 하늘의 공판정에 나서서 재판장으로 계신 하나님 앞에서 사탄을 검사로 세워 놓고 당당히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승리적인 죄수가 되어야 합니다. 법정에서의 변호인은 자기 의지대로 판단하여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변호인보다 낫기만 하면 변호인은 변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변호인은 죄인이 볼 수 있는 이상의 법조적인 조건을 찾지 못하면 죄인을 해방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죄수가 변호인보다 나아야만 법정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만 해결하지 못한 문제,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한 비밀의 내용, 이러한 것들을 전부 파헤쳐 가지고 '그대는 이러이러한 조건에 의해 가지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니라. 이러이러한 조건을 해방했더라면 개인적 십자가는 물론, 세계적 십자가도 짊어지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느냐'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도리를 필요로하는 사람들로서는 통일원리권내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동안 수고해 가지고 신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신부가 뭡니까? 신부가 무슨 신부입니까? 이건 여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서 확실히 알겁니다. 이것은 엄청난 비밀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서슴지 않고 또다시 공격할 수 있고, 또다시 담대하게 논고를 세울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세계적인 승리의 왕자를 찾아 나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예수님이 지고 가던 십자가 이상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각오를 하고 가지 않으면 세계적인 구원섭리의 한계선을 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주적인 이 통일권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느냐? 자나깨나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태어난 것도 이것을 위해 태어난 것이요, 사는 것도 이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요, 죽는 것도 이것을 위해 죽는 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을 찾아가는 것도 이 목적에 협조하게 하기 위한 것이요, 내 개인이 가는 것도 이 목적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횡적인 무대를 넓히고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무리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 있고, 가정 가운데 혹은 민족 가운데 드러날 수 있는 이념을 실천하는 종교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