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집: 인류의 새로운 장래 1975년 04월 25일, 한국 전주 실내체육관 Page #297 Search Speeches

하나님께서" 어찌하- '위하라'"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가

그러면 도대체 어찌하여 하나님이 '위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 '위하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이게 문제가 돼요. 그 내용을 좀 얘기해 보자구요.

여러분 앞에 한 가지 묻자구요. 여러분 자신들 앞에 어떤 분이건 어떤 누구든 좋아요.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신세를 지우는데 그야말로 백 퍼센트 생명을 다 바쳐 여러분을 위해서 신세를 지운다면, 여러분이 그 신세를 갚는 데에 있어서 한 50퍼센트는 포켓에 집어 넣고 50퍼센트만 신세를 갚고 싶어요, 아니면 백 퍼센트 이상 갚고 싶어요. 그거야 뭐 물어볼 것도 없다는 거예요. 저 할머니도 '아 백 퍼센트 이상 갚아야지….' 하는데…. 백 퍼센트 이상 갚고 싶다는 거예요. 만일에 이와 같은 본성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내가 여기 A면 A라는 사람에게 백 퍼센트 신세를 지웠다고 합시다. 그러면 A라는 사람이 진정히 나를 위해서 그 신세를 갚아 주는 데 백 십 퍼센트, 백 열로써 갚아 준다 이거예요. 그렇게 갚아준 A에 대해서, 즉 자기가 정성을 다해 가지고 신세를 끼친 그 사람이 백 퍼센트 이상 정성을 다해서 백 십 퍼센트로 갚는다면, 그 진정에 대해서 자기는 백 이십 퍼센트로 갚고 싶다는 거예요. 이렇게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면 할수록 점점점점 더 커 가는 거예요.

이러한 원칙에 있어서 무엇이 생겨나느냐 하면 여기에서 영원이란 개념이 설정될 수 있다는 거예요. 영원이란 개념이 여기에서 설정된다는 거예요. 영원은 여기에서부터 생겨난다 이거예요. 상대를 위하는 데에서만이 영원이 있지, 자기를 위하는 데에서는 전부 다 갈라지는 거예요.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영원한 개념이 이 위하는 데에서만 생기기 때문에, 지혜의 왕이신 하나님은 이러한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원일 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비로소 번창이 벌어지는 거예요, 번창이. 다시 말하면, 발전이 그 자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지혜의 왕 되시는 하나님은 위해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박수)

그다음에 또 한 가지는 오늘날 뭐 소위 지성인들, 대학이나 다니고 자기 나름의 주장을 할 줄 아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일수록 어디 가든지 지기 싫어한다 이거예요. 자기를 중심삼고 그 학교를 뒤흔들고 세계를 뒤흔들어 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남한테 주관 받는 것은 죽어도 싫다 이거예요. 여러분도 남한테 주관 받는다는 것은 죽어도 싫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천만에요 천만에. 진정히 주관받을 수 있는 자리는 행복한 자리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는 거예요. 보라구요. 나를 진정히 위하고, 나를 진정히 사랑하고, 진정히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런 분한테 주관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남한테 주관받으면 '외롭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위하는 분, 위하는 분을 중심삼고 주관받으면 그것 이상 행복이 없다는 거예요. 또, 여러분이 주관받지 않고 주관하겠다는 것은 뭣이냐? 주관하겠다는 것은 어떤 중심존재가 되겠다는 욕망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절대 남한테 주관받지 않고 내가 주관하겠다고 하는 것은 내가 중심존재가 되어 보겠다는 거라구요.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를 위하라고 한다면 절대 중심존재가 못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말하면, 한 가정에 여덟 식구, 부모가 있고 여섯 형제가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막내 되는 동생이 누구보다도 그 가정을 위하게 될때는 어떻게 되느냐? 그 어머니 아버지도 그 아들한테는 머리를 숙이는 거예요. 아무리 꼬마 동생이라도 시일이 가면 갈수록 그 형님 누나들은 위해 존재하는 동생을 자연히 중심존재로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집의 중심이 누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자기를 위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체를 위하는 동생이 되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일이 가면 갈수록 그러한 존재가 중심존재가 되는 것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일 해라! 좋은 일 해!' 하는 것이예요. 좋은 일이라는 것이 뭐예요? 위하는 것 아녜요? 위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중심존재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위해 존재하는 중심으로 계시기 때문에, 위해 존재하시는 그 하나님이 중심존재로 계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같은 존재, 하나님과 닮은 존재인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과 같이 자기의 소속 분야에 중심존재로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위해 존재하는 데에서만이 참된 중심존재로 등장할 수 있다 이거예요.

참된 중심존재로부터 주관받는 데에는 반발이 안 생기는 거라구요. 꿈에나 생시에나, 낮이나 밤이나 언제나, 그럴 수 있는 존재를 만난다면 그분에게 주관받는 이상의 행복이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생각 안 해 봤죠? 예를 들어 여러분이 천상세계에 가게 된다면, 하나님이 위해서 존재하는 우주적 중심존재이므로 그분에게 천년 만년 주관받더라도 그것이 행복 중의 행복인 것과 마찬가지로, 위해 존재하는 그분에게 주관받는 데에서만이 자기의 행복의 터전이 설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만이 오늘날 세계가 문제시하는 계급적인 문제,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문제, 다시 말하자면 정치 철학의 난문제 등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닮은 사람은 그런 자리에 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확실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박수)

그 다음 세째번으로 왜 하나님은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여러분, 사랑이니 이상이니 이런 말들을 오늘날 이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것인 줄 알았다구요. 자기 것인 줄, 자기에게서부터 오는 줄 알았다구요. 이게 틀렸다는 거예요. 사랑은 자기로부터 오는 줄로 생각 했다구요. 천만에요, 천만에요, 천만에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느냐?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구요. 상대에게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다는 거예요. 상대에게서 온다는 거라구요. 이상이 어디에서?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구요. 상대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상도 상대를 통해서 찾아와야 된다는 거예요.

생명보다도 귀한 사랑, 사랑과 이상이 자기 상대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 고귀한 것을 받으려면 겸손히 머리 숙여 위하는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등등의 요인 때문에 하나님도 '위해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주 시민 여러분들이 알아 가지고 이 원칙대로 산다면 전주는 지상의 천국을 형성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박수)

여러분들은 참된 이상과 행복과 평화의 기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물음에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자기에게 있고 다른 어떤 미래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니예요.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위하는 자체를 완전히 발견하는 데에서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상과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의 행복한 세계가 접근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