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집: 전진과 후퇴 1970년 11월 2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29 Search Speeches

왜 전도를 해야 하"가

만약에 여러분의 할머니가 배가 고파 허기증이 나서 길을 못 가고 앉아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할머니를 모시고 가야지요? 그럼 모시고 가는데는 어떻게 모시고 가느냐? 길잡이가 되어 가지고 모시고 가야 됩니다. 그런데도 못 걸어가시면 업고서라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효도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넘어가는 데 있어서 업고서라도 그 고개를 넘게 되면, '고맙다' 이렇게 얘기하지, '이놈의 자식아 할머니를 업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고개만 넘어 가면 다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들은 정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동적인 자극과 자발적인 열의를 갖지 못하고 있으니, 피동적인 자극과 피동적인 열의라도 갖게 하기 위하여 선생님이 때려 모는 것입니다. 내몰아 가지고 민족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이 민족은 날로 발전할 것입니다. 한나라의 주권자가 선두에 나와 가지고 자극을 받지 못하면 그 민족은 부끄러운 내일을 맞는 겁니다. 주권자가 새로운 활동 체제를 거국적으로 전개시키면 그 나라는 부흥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새로운 활동 체제를 반대하는 주권자가 나와 망하게 되면 사람들은 혼자 망하려고 안 합니다. 주권자를 깔고 망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통일교회가 망하게 된다면 자기 혼자 망하려고 안 할 것입니다. 선생님을 깔고 망하려고 할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몰랐으면 안 그랬을 텐데 통일교회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안 나왔으면 내가 이렇게 안 되는데, 통일교회 문선생이 나와서 내가 이렇게 됐다'고 하면서 선생님을 깔고 망하려고 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입장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여러분을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전도하러 나가겠어요, 안 나가겠어요? 「나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할 수 없으니까 '나가지요'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서 나가겠다고 하지만 그 길을 가고 나서는 '아이고, 내가 살 길이 이 길이구나. 이 길이 좋은 길이구나'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피동적인 결과를 통하고, 간접적인 자극을 주어서라도 현재의 입장에서 벗어나 이동시켜 놓는 것이 여러분을 살려주는 방법입니다.

나가서 그렇게 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후회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못해본 사람들은 죽을 때 '한번 해볼껄'하고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다가 죽으면 '하다 죽으니 할 수 없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갈 곳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해볼껄' 하다가 죽어서 후회하는 사람은 갈 곳을 가지 못하여 유리(流離)하는 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다 되어 있다면 선생님이 필요없습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선생님은 안방에서 할아버지 노릇하면서 살고 싶은데, 팔자가 사나운지, 여러분들을 잘못 만났는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하가 잘못하게 된다면 임금이 어질 수 있습니까? 따르는 사람이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있다가는 망하겠으니 여러분들을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찬성합니까? 찬성이요, 찬성 아니요? 「찬성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감옥살이 등 별의별 경험을 다했습니다. 그것들을 지금 지내고 보니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수고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거친 그 과정들은 절대로 나한테 마이너스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배가 고플 때의 밥 한알이 얼마나 귀한지 지금도 정신이 번쩍듭니다. 밥 한알이 그렇게까지 온 신경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에 대한 무한한 가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 그 밥을 그리워하면서도 그것을 잊으려고 애쓰면서 하나님을 더 그리워하고자 눈물을 지었습니다. 또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남이 모르는 가운데 눈물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선생님은 평범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극이 필요합니다. 자극을 보급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충격적인 방향성을 갖추어 가지고 자기가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친구들도 칭찬해 주는 친구보다 책망도 하고 미래의 나에 대한 새로운 목적관을 제시해 주는 친구를 좋아했습니다. 그저 놀자고 하고 맛있다고 먹자꾸나 하는 친구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논을 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싸워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놀음을 좋아했지, 얌전하게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