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집: 다시 눈을 떠서 하늘을 바라보자 1959년 02월 1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69 Search Speeches

예수님의 생활 태도

아담이 옆으로 들어오는 말을 통째로 받아들이다가 망한 것처럼 우리도 흘러 내려오는 사조를 통째로 받아들이다가 죽는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재감정하여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과 생명과 정적인 이념을 통하여 이것을 감정할 수 있는 주인의 입장에 선다면 어떤 사상이 여러분을 구속하겠습니까? 어떠한 사상도 여러분을 구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 문제가 해결되었던들 여러분의 마음세계는 평화가 찾아졌을 것이며 여러분의 생활환경에도 행복이 찾아졌을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향유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상을 부르짖고 있는 주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심적인 해방, 정적인 해방, 이념적인 해방을 시켜 준 주의는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눈을 들어 잠자고 있던 자기 일신을 서러워하고 깨어난 해방의 한날을 소망하고 오늘의 환경을 박차고 나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거기에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인간들은 지금까지 몰랐습니다.

그러면 역사 노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나온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이뇨, 그들은 시대를 박차고 `오! 하늘이여' 하였던 사람들이며,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오르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대에 용납을 받지 못하였고, 그 시대에는 낙오자와 같은 입장에 서서 불쌍한 생애의 노정을 걸어 갔습니다. 이들은 인간 세상에서 불쌍하다면 지극히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남들은 잘도 의지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의지할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자기의 심정을 털어 놓고 의논할 수 있는 친구도, 자기와 더불어 생명을 걸고 싸워 줄 어떤 동지도 갖지 못한 채 그들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타락 이후 4천년만에 나타난 하나의 청년,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시대를 부정하고 환경을 부정하고 그때까지의 교단을 부정하고 나섰던 청년 예수는 무엇을 주장했던가? 예수님은 인간이 모르던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은 예수는 현실의 모든 것이 인생의 전체적인 이념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세상이 배반하여도 이것을 박차고 다시 새로운 눈으로써 새로운 자아를 바라보았고, 새로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나아가 새로운 주의를 늠름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가치가 현세적인 어떤 가치보다도 높고 귀하고 크다는 것을 알았던 그였기에 이스라엘이 배반하고 유대교단이 배반하여도 까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회와 가정, 어떤 유명한 학자가 배반하고 어떤 제사장이나 교법사가 반대하더라도, 어떤 풍파나 곡절이 사방에서 자기의 일신에 마구 부딪쳐 들어온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까딱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다시 눈을 들어 `하늘이시여!' 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의 생활신조였던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환경을 보고 무한히 슬픔을 느꼈던 예수는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슬퍼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죄송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에게는 자신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보내 주신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배척한 무리에 대해 가슴에 맺힌 서글픔의 장벽이 있었도, 그 하나님을 수없이 배반한 인간들에 대한 서글픔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자기 일신이 죽음의 제물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슬퍼하시고 인류를 위하여 싸워 나오신 안타까운 심정에 비하면 초개만도 못하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정하고 하늘의 심정을 앞세워 머리 숙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인류의 새로운 각성은 촉구되었고 제2의 자아가 출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인류는 회생의 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4천년간 슬픔과 어두운 잠 가운데 있던 인류가 예수를 믿었다면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회생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