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집: 남은 때 1970년 05월 2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53 Search Speeches

탕감조건을 청산하려면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 공적인 탕감노정을 출발하기 전에 나 자체의 탕감의 한계선을 어떻게 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체적인 탕감노정을 생각할 때, 자기 개체가 넘어야 할 탕감의 양이 얼마나 될 것이냐? 혹자는 열, 혹자는 백, 혹자는 천, 혹자는 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천태만상의 인간상을 보면 그 배후에 각자에게 지워진 탕감의 모양도 천태만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느누구를 표준하여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가 행복하다고 할 때의 그 행복은 개인으로부터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입니다. 즉, 그 선조들의 선한 공적을 통하여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의 선한 선조들은 선한 공적 생활을 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못 했습니다. 그의 조상들 중에는 일생의 노정에서 자기 개인을 중심하고 행복한 생애를 거쳐간 것이 아니라, 공적인 입장에 서서 불행한 생애노정을 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불행한 길을 가면서 남긴 공적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미래의 소망을 위해 자신의 현실을 소모시키고 생을 소모시킨 공적의 터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조들의 공적의 터전 위에 세움을 받은 사람들, 다시 말하면 미래의 희생의 대가를 선조들이 이미 치러 놓은 터전 위에 태어난 후손들은 미래의 어느 한계점까지 가서야 있게 되는 탕감의 기간이 찾아올 때까지 어떠한 사회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복받을 수 있는 생활권내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탕감요인을 자기 선조가 탕감지은 입장에서 태어난 사람일수록 현시점에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보고 아직 탕감의 내용이 남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도 저와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란다 해도 그들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바란다 하더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면 바랄수록 그 소망 앞에는 가중된 시련과 가중된 탕감의 내용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행복이 빠른 기간내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가중된 탕감요인이 자기 앞에 부딪쳐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적인 자리에 나가기 전에 자신이 청산지어야 할 탕감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탕감이 얼마가 남아 있다는 것을 짐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1년에 탕감하느냐 혹은 한달에 탕감하느냐 할 때, 아마 그것을 1년 동안에 탕감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으로는 한달에 그것을 모두 탕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달에 탕감하려고 하면 10배로 가중된 시련이 닥칠 것이기 때문에 그 시련을 감수할 수 있는 자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탕감조건을 한달에 청산지으려면 그냥 그대로의 입장에서는 안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맹세를 하여야 하는데 맹세를 하는 데는 반드시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속된 사람들도 맹세를 할 때는 칼을 꽂고 하든지, 혹은 다른 무엇을 걸고 맹세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가야 할 길 앞에 있는 탕감의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해당하는 내적인 맹세와 결의를 하여야 하는데 거기에는 탕감조건에 대비될 수 있는 조건을 걸어야 합니다.

제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새로운 약속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물을 드릴 때는 무엇을 위해 드리느냐? 여기에는 목적관이 뚜렷해야 됩니다. 목적이 없는 맹세가 없듯이 목적이 없는 제물도 없는 것입니다.

탕감의 길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소모되어야 합니다. 또한 단지 시간의 소모뿐이 아니라 자기 자체의 소모가 벌어져야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체의 소모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건물로 제시하는 것이 제물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