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집: 또 가야 할 복귀의 길 1964년 10월 03일, 한국 대구교회 Page #261 Search Speeches

복귀의 길을 ""어 오신 하나님

그러면 6천 년 역사는 뭘하는 역사냐? 잃어버린 참부모, 아담 해와가 완성한 그 기준을 복귀하는 역사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러면 복귀된 후에는 뭘할 것이냐? 구주로서의 명사는 필요 없어요. 구주로서의 명사는 필요 없고 형제로서의 입장에 설 수 있는 주님을 모실 줄 알아야만 천국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것이 복귀의 도상이예요. 그래야 그거 이치에 맞을 게 아니예요?

그러면 아까 오늘 말씀의 제목이 '또 가야 할 복귀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왜 또 가야 되느냐?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이 없으면 한 번 가면 그만이예요.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3시대를 거쳐가야 돼요. 구약시대는 소생이요, 신약시대는 장성이요, 앞으로 새로 오는 시대는 완성시대입니다. 한 사람이 이 3시대를 거쳐 일대에 완성을 표준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거리를 중심삼아 가지고 아담 하나를 빚어 만드는 것이 재창조역사입니다. 아담 하나를 재창조하는 역사로 지금까지 거쳐온다는 거예요.

아담가정을 중심삼고 아담이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복귀하고자 하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는 아벨이 책임 다하지 못한 연고로 하나님은 아담가정에서 다시 밀려나 노아시대로 나온 거예요. 노아시대로부터 아브라함시대, 아브라함시대로부터 모세시대로, 모세시대로부터 예수시대로까지 왔으나 예수가 그 한을 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성신이 2천 년 역사를 거쳐 가지고 지금 시대까지 왔습니다. 이 온 역사적인 흐름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프로에 의해서 복귀돼 나왔다는 걸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또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을 하나님은 더듬어 왔다는 것입니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복귀의 기준을 세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1600년을 일기로 하여서 하나님은 아담 대신 노아를 불러 세웠습니다. 노아를 불러 세워서 '이제부터 120년 후에 홍수심판을 한다'고 예고하게 될 때 노아 자신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몰랐습니다. 들려오는 것은 명령뿐이라는 거예요. 이제부터 120년 동안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나간 후에는 기필코 이 천하를 심판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대해 나오던 하나님이 어떤 내정적인 슬픔과 비장한 각오와 한을 풀기 위해서 노아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했지만 노아는 묵묵히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일편단심 그 신념 가운데서 어느 한 촌시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환경에 있어서 120년 동안 이 노아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복귀세계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면 제2의 인간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악한 세계에 있어서 모진 바람과 모진 시련과 모진 환경에 부딪쳐야 됩니다. 노아는 부딪치는 그 환경에 있어서 아담과 같이 천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한 자리에 서지 않는 그러한 확고한 기반 위에 서지 않으면 안 돼요.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120년 동안 아라랏산에서 배를 만드는 그 기간은 행복한 기간이 아닙니다. 덧없는 세월이 흘러갈 적마다 그 환경에 처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노아 할아버지를 미친놈으로 취급했다는 거예요. '뭐 120년 동안…. 뭐 심판을 해?' 이렇게 조롱과 비소, 억울함과 분함이 휘몰아치는 그 환경 가운데서 시달림을 받지만서도 하나님과 약속한, 정녕 약속한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그 일념의 신앙심만을 갖고 그 환경을 격파해 나갔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 자기 아내와 자기 자식들까지도 노아를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120년 동안 그 짓 하고 있으니 여러분이 아내가 되고, 여러분이 형제가 돼 보라구요. 비웃었겠나요, 안 비웃었겠나요?

사랑하는 아내도 노아를 저주했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노아 할아버지를 저주했습니다. 믿어 주기를 바라서 그 가정을 세웠고, 믿어 주기를 바라서 자녀를 준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었습니다. 그를 위해서 일치 단결하여 그 가정이 노아의 뜻을 받들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세워지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아의 가정이 믿지 못했습니다. 반기를 들고 배반하는 그 자리에서도 노아는 이 가정을 끌고 최후의 한날을 약속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노아 자신은 하나님이 얼마나 슬펐고, 얼마나 억울했고, 얼마나 분했던가 하는 그 내정적인 심정은 모르면서 이렇게 믿고 나왔다는 거예요. '나보다도 더 딱한 자리에 선 분이 하나님이 아니냐?'라고….

그런 환경에서 몰아침을 받고, 그런 환경에서 시달림을 받는 노아를 바라볼 적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비통함에 사무쳤지만 노아 앞에 그런 사정을 통고할 수 없는 종의 입장에서 대해 나왔다는 거예요.

이리하여 노아는 40일 홍수심판 후에 승리의 터전을 마련했지만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노아를 중심한 섭리는 깨진 거예요. 깨져 나갔어요. 하나님은 세계를 심판해 버리고 남겨진 노아가정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이 있으니 그 가정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분함과 원통함이 얼마나 사무쳤겠어요? 그렇지만 또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는 하나님이었다는 걸 몰랐다는 거예요.

노아가정에 섭리한 뜻이 저끄러짐으로 말미암아 4백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일구월심 한 마음을 중심삼아 가지고 노아 대신 아브라함을 세워서 다시 복귀의 길을 더듬어서 오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걸 오늘날 누구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누구도.

이리하여 아브라함을 세워서 뜻을 완결지으려 했으나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를 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3대의 연장이라는 슬픈 명사가 생겨난 것을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서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대하는 본래의 그 마음과 결과적으로 벌어진 슬픈 사정을 바라볼 때 얼마나 비통했겠느냐? 당장에 그 아브라함 일족을 전부 다 때려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또다시 남아진 복귀의 길, 소망의 천국을 향하여 가야 할 하나님의 애절한 심정이 남아 있는 연고로, 그 심정이 더 크기 때문에 또 참고 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야곱까지 3대의 인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에서와 야곱이 싸워서 야곱이 승리의 이름을 갖추고…. 야곱이 하란 땅 라반의 집에 가 가지고 21년 동안 종의 도리를 거쳐오게 될 때 야곱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을 전혀 몰랐다는 거예요. 억울하고 분한 사정에 몰리더라도 또 가야 할 하나님의 복귀의 노정입니다. 천대를 받고, 밟힘을 당하고, 몰림을 받고, 원수시함을 받더라도 또 복귀의 노정을 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이 큰 것을 알고 약속하신 뜻, 하나님이 약속한 그 뜻을 믿는 신앙심을 가져 가지고 라반의 가정환경에서 모든 것을 복귀시키는 조건을 중심삼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거예요.

이리하여 에서와 대결해 가지고 승리의 터전을 마련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아 가지고 이 땅 위에 하나님이 비로소 발붙일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발붙일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승리했다는 뜻이예요.

그리하여 이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애급 4백 년 고역 기간을 거쳐 이스라엘 60만 대중을 이끌고 가나안 천국, 지상천국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 1세들이 광야에서 다 쓰러짐으로 말미암아 제2세를 수습하여 가나안 7족을 대결하게 해 가지고 비로소 이스라엘에 천국이념을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흐지부지하여 비참한 역사노정을 거쳐서 예수시대까지 끌고 넘어왔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