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집: 전진과 후퇴 1970년 11월 2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12 Search Speeches

자기 발견과 자아 완성

사람은 자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우주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우주에까지 미쳐 나갈 수 있는 인연이 없어 가지고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위하려고 존재한다면 그 위할 수 있는 힘이 보급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선한 인간을 중심삼고 보급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움에 사무치게 될 때는 그러한 경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생에 언제 한번 신경이 굳어지고 눈이 굳어지듯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상 감각적일 때 그것은 나의 의식적인 감각이 아니라 초의식적인 감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양전기면 양전기, 음전기면 음전기의 수억 볼트가 합해지면 그 힘이 커지는 것입니다. 커진 힘끼리 합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모든 신경기관이 산만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히 하나되어야 높아질 수 있는 정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상은 자기를 위주한 정상이 아닙니다. 더 높아질 수 있는 정상이기 때문에 자기가 있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공적인 바탕에서 시작되는 그런 경지를 모색해야 하고, 나 자체를 그런 경지의 순수한 바탕으로 유입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영원한 생명의 인격을 갖출 수 없고, 보다 가치적인 인격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삼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놓고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상대를 위해서도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이요, 자기를 놓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상대를 위해서도 웃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웃었다 해도 그 웃음은 순수한 웃음이 아니요, 만민에게 필요한 웃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웃는 웃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 자신을 중심삼고 우주주관을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하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현재 입장을 자극시켜 가지고 미래의 입장을 변혁시킬 수 있는 그런 요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바탕은 어디까지나 순수해야 됩니다.

기도할 때 선령과 악령은 어떻게 가리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이 수직으로 비추는 빛을 반사하는 순수한 반사경처럼 되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악이 가려야 할 입장일 때는 절대 자기의 욕망을 먼저 생각하여서는 안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영의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순수한 자리에 들어가 가지고 '나는 참에서 태어났고, 참에서 살고, 참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하는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선악을 대번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설명이 필요없다는 거예요.

악과 선의 바탕은 언제나 서로 반발하는 요소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은 자기 자체에서 또 다른 자체를 세우려 하기 때문에 선은 여기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악은 파탄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되면 자기에게 악이 침범해 들어온다는 것을 대번에 아는 것입니다. 기분으로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심령상의 전진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보다 순수한 마음을 갖추어야 됩니다. 제일 기준이 되는 그 경계선은 순수한 바탕입니다. 순수하다는 것은 순수한 자기를 중심삼고 시대를 넘어서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공적인 것입니다. 어린애와 같은 자리가 순수한 자리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애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거기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흠모하고 그리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그리워합니다. 선생님은 옛날 감옥에 있을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해봤습니다. 육신이 배고플 때는 얼마나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지 모릅니다. 그럴 때 먹을 것을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보다도 하나님을 더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서럽고, 억울하고 배고픈 자리에 있더라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자기 완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렵고 서럽고 억울하고 배고픈 것들을 바탕으로 해 가지고 그 이상의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느냐? 서럽고 어려운 일을 아무리 무시해도 그것은 나한테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높은 곳을 위하는 마음을 보충시켜 가지고 그 마음으로 서글픈 자리를 전부 채우고 남아 기쁨을 느끼는 자리에 서야만 기쁨이 영주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 슬픔으로 시작해서 슬픔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슬픔으로 시작해서 무한한 기쁨으로 끝나는 자리, 즉 전진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또, 기쁨으로 시작했으면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더 큰 나를 중심삼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슬픔을 느끼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는 새로운 열의를 갖고 출발해 나오는 자리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지금 자기를 중심삼고 기쁨으로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 자리는 더 큰 문제를 중심삼고 본다면 말할 수 없이 슬픈 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그 슬픔을 붙안고 나오는 데는 상상도 못할 열의에 충천되는 새로운 출발의 동기를 안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짝을 이루는 자리가 아니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