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집: 우리의 책임 1970년 08월 29일, 한국 중앙수련원 Page #35 Search Speeches

우리가 서야 할 자리

대한민국은 미국에 목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애그뉴란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대한민국의 메시아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을 믿지 박대통령이나 미국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벌써부터 미국을 믿지 않고 있었어요.

대한민국은 자주 역량을 보강해야 합니다. 이런 때에 동지를 구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요, 패자의 서러움에 봉착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더라도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했을 때 흘려야 합니다. 그 눈물은 감사의 눈물이지 동지를 구하는 눈물이 아닙니다. 동지를 구하는 눈물을 흘리는 자리는 패자의 자리이지만 승리의 자리에서 흘리는 눈물은 승리의 영광을 맞이하는 눈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도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을 믿을 것이 아니라 삼천만 민족이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중심삼고 단결하게 되면 김일성이는 맨주먹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되기 전에 그럴 수 있는 전통적 움직임을 민족적인 한계권에까지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내적 외적으로 파급시키기 위한 활동을 독자적으로 전개해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후원한다고는 했지만, 선생님은 거의 혼자 지금까지 이러한 내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국가적 기준까지, 혹은 초교파적, 초종교적 기준까지 이끌어 온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러한 내적인 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국가를 위한 정세나 세계를 위한 정세가 우리 눈 앞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요리해야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요리를 하려면 거국적인 요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종적인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횡적인 활동 능력이 있는 사람을 교육해야 되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1970년도 계획입니다. 머지 않아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따라 나오지 않더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남아돌 정도로 많이 모여들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주체적인 입장에서 섭리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변치않는 전통적 기반 위에 선 자각된 자아로서 금후의 나라와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서야 할 자리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서게 되면 모든 여건이 반대적 입장에서 우리를 향해 중심이 되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오고 있습니다. 이 수련소를 지을 때도 선생님은 1970년대에는 반드시 그럴 때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던 것입니다.

나라를 위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라와 다리 놓을 수 있는 어떠한 계기가 있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금년초부터 수련에 관한 말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경찰국 정보과장이 우리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승공활동이란 통일교회의 승공연합과 같이 사상적인 기틀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여러 도를 다니면서 실지로 활동해 본 결과 통일교회의 승공연합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확신이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천 지구장을 만나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국장도 우리를 돕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도지사를 움직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거도적인 일을 하려면 지구장만으로 안되니 내가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동원시킬 인원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한 5천명 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 몇 개월 동안 교육시킬 거냐고 물었더니 6개월이라는 거예요. 이게 장기간이 거든요. 그래서 틀림없이 할 것이냐고 세 번씩이나 다짐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계획을 세워서 국장의 결재를 받아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서면결재를 받아 가지고 다시 왔더군요. 2월 중순이나 3월 중순부터 하라고 결재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기로 결정은 났는데, 어디서 할 것이냐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다가 수택리에서 하기로 결정은 했는데 이곳에서 교육을 하려면 지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 번에 들어오는 인원이 2백명 내지 3백명이 될텐데 그 인원을 교육하게 되면 상당한 지장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식당도 없고 3백명을 수용할 곳도 없었습니다. 더우기 외부 사람들이기 때문에 공장에 수용할 수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또 이들을 모아 놓으면 담배도 피우고 할 텐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가 수련소를 짓기로 한 것입니다. 틀림없이 교육을 하기로 약속하고 부랴부랴 집을 짓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래는 수련소를 20여일만에 낙성하려고 했는데 결국 30일만에 낙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이런 집을 지으려면 2년은 걸려야 될 것입니다. 또 비용도 2천 5백만원 정도 들어가야 되는 것을 우리는 2천만원 미만의 비용으로 완공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그래서 통일사상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얘기하듯이 이 집을 지을 때의 그 역사가 남는 것입니다. 이 수련소를 한 달만에 지었다는 것이 역사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모든 것을 내가 주관했습니다. 내가 직접 지휘했어요.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니 온갖 정성을 다 퍼부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을 데려다가 교대로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만 보면 일을 시킬까봐 도망친 녀석들도 있었고 별의별 녀석들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련소를 지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