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집: 위하는 삶을 통한 종족적 메시아 사명완수 1990년 07월 11일, 한국 국제연수원 Page #206 Search Speeches

인격도야 - 영(零)의 자리- 서라

여러분들 몸과 마음을 가만히 보면 마음은 몸뚱이를 위해서 자꾸 투입하지요? 그게 하늘 편입니다. 그럼 그게 왜 하늘 편이냐 할 때, 그걸 어떻게 대답하겠어요?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본성의 하나님이 그런 기준에서 존재의 시원을 삼아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내 마음은 몸뚱이를 대해서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또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일생 동안 내가 혼자 생각하는데도 나쁜 일이면 마음이 '예 이놈!' 하고 브레이크를 거는 것입니다. 틀림이 없어요. 마음은 몸을 위해 밤이나 낮이나 투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 마음이 하나님 편이다 이것입니다. 몸뚱이는 뭐냐? 몸뚱이는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투입하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투입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니 이 몸뚱이는 사탄 편이다 이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역사는 전부 다 수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지의 모든 추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기원이 여러분 자신이예요. 여기에서 여러분이 딱 곧추 서 가지고 이 둘 가운데 수직선을 갖추어야 됩니다. 수직선을 갖추려면 참사랑을 해야 됩니다. 참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참사랑을 통해 가지고 수직선이 돼야 돼요. 90각도를 갖춘 수직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뚱이는 무슨 편이라구요? 「사탄 편입니다」 자기를 위하라고, '나에게 투입해라' 하는 건 사탄 편입니다. 복귀시대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내 인격을 도야하는 데 있어서 출발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내가 재창조되는 입장에 서야 되기 때문에 영(零)의 자리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알겠어요?

내가 은혜를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대상의 자리에까지 나가기 위해서는 자기 의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아까 말한 것처럼 무슨 기성교회 신학을 했느니, 한국 사람이니 하는 의식이 없어야 됩니다. 흙덩이와 마찬가지가 되어야 돼요. 왜? 하나님의 창조 당시와 같은 재창조의 과정을 거쳐 가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당시에 흙과 물과 공기, 이것들은 의식이 없었습니다. 영점이예요, 영점. 영의 자리에서부터 빚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윤박사 그런 거 알지, 요전에 내가 세밀히 얘기해 주었기 때문에? 윤박사는 영의 자리에 섰나, 뜻 앞에?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말이 그거예요. 완전히 영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새로이 재창조되어 보다 나을 수 있는 사랑의 상대적 존재의 기원이 생기니까 하나님이 거기에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이론적입니다. 이걸 확실히 가르쳐줘야 된다구요. 알겠나, 무슨 말인지? 「예」

그래서 통일교회의 생활철학은 뭐예요?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위하는 데는 어느 정도? 참으로 위하라는 거예요. 참으로 위하는 게 어느 정도예요? 그 기준을 못 잡으면 백 사람이면 백 사람, 천 사람이면 천 사람의 기준이 전부 다르게 되어서 나중에는 참으로 위한다고 하는 그 기준이 모호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권 전체를 투입하고 또 투입할 수 있는 자리, 하나님과 같은 그런 상대적 심적 자리에 들어가게 될 때 참의 대상의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걸 똑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기준에서 자기 인격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과거지사, 선생님을 30년 40년 믿고 따라다니고, 지금까지 뭐 어떻고 어떻고 하는 시시하고 복잡한 것 암만 풀어 놓았댔자 그건 쳐 주질 않아요. '나'라는 기원, '나'라는 걸 중심삼고 이 원칙에 부합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얼마나 남았느냐 이거예요.

그걸 못 하게 될 때는 남편이 아내 보기에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됩니다. 머리숙일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내로서 그것을 못 하게 되면 남편의 그늘 아래 사는 것에 대해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됩니다. 어머니 아버지 자리에서 그걸 못 하면 자식을 대해서 부끄러운 자리에 있다는 걸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각한 거예요. 이게 원리적 기준입니다.

이 원리적 기준에 일치하지 않고는 저 영계에 가 가지고 보류권에서 천년만년 머물 것이다 이거예요. 예수님은 죽어서 낙원에 갔지만 임자네들은 살아서 낙원권 내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거 어떻게 들어가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왜 낙원에 갔느냐? 줄래야 줄 수 있는 상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요? 사랑의 상대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결혼했더라면 오늘날 기독교 교파가 이렇게 많아졌을까요? 결혼해서 예수님의 아들딸, 예수님의 손자가 나왔다면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경 66권이 뭐예요? 신랑으로 온 예수님이 신부 찾자는 것 아니예요? 그럼 그 신부는 어떤 신부냐? 하나님이 완전 투입하는 데 있어서, 자기 의식을 넘어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 제일 기준에 선 그러한 상대적 존재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남편 되는 예수님도 그러한 남성적 기준에서 그런 상대를 찾아오는 것이다 이거예요. 그런 남자 여자가 세상에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없으면 어떻게 해요? 자기 일족을 전부 팔아서라도 사올 수 있으면 사 와야 되겠어요, 안 사와야 되겠어요? 「사와야 됩니다」 그런 생각 해봤어요? 그런 일족이 있어요? 그런 분 사올 수 있다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천 수만의 일족을 주고도 못 사는 것입니다.

일족이 완전히 거기에 상응할 수 있는 영점 자리에 서서 주체를 영원한 이상으로 추앙하고 하나님같이 사랑하고 모실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상대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누가 거기에 서요? 하나님이 볼 때 그런 기준에 하나도 맞지 않는 일족이면 몇십만 명이라 하더라도 그걸 대하실 것 같아요? 그 따위 것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일족 가지고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다고 봐요? 일국 가지고도 안 돼요. 세계 가지고도 안 됩니다. 세계를 다 줘도 안 바꾼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신앙 기준을 볼 때, 통일교회에서 인격을 구성하는 그 인격적 기원이 얼마나 신중하고 얼마나 가치적인 뿌리의 자리에 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제멋대로 세상에서 살던 누더기 보따리 싸 가져 와 가지고 그걸 꽁무니에 늘어뜨리고 다니면서 이것이 통일교회다 하고 생각하다가는 큰 오해라는 것입니다. 일대 혁신 운동을 해야 할 때가 목전에 다가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