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집: 사랑을 이한 한(恨) 1970년 10월 0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85 Search Speeches

예수님이 재림하"야 하"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4천년의 수고로운 역사노정을 거쳐 이 땅에 보낸 예수님을 무한히 사랑하고 싶었을 텐데, 왜 사랑하지 못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진정한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갔습니까? 예수님은 사탄세계에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하늘의 비밀을 체득하고 배후의 역사시대에 저끄러졌던 내면적인 사실을 풀어 나오는 도상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는지 모릅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깊은 진리의 내용을 알아서 그것을 체득하는 자리에서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입장이라고 선포할 수 있으되 생활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갔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하신 말씀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불이 붙을 때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49-50)'고 하신 탄식의 말씀을 추리해 볼 때, 예수님은 역사시대에 감추어졌던 진리 탐구의 길을 개척하는 개척자로서는 만민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는지 모르지만 생활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이 땅에 왔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몰림으로 시작하여 몰림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비운의 생애를 마쳐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생활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가셨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상적인 독생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활적인 면모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반대를 받고,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민족 반역의 선동분자라고 규탄을 받아 추방된 고아의 모습만을 보여 주었을 뿐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 가슴에 심어져 추대받는 주인, 천상의 역사적인 대표인물로서 추대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이 쫓기고 몰림받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생활적인 면에서 메시아적 가치와 인격을 보여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생활무대를 떠나 가지고는 이상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자연적인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인격관과 세계관을 중심으로 '나는 행복했다. 나와 같이 되라'하는 입장에 서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민 앞에, 혹은 천상 앞에 갖추어진 사랑의 행동자라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사실입니다.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하는 말씀은, 예수님은 미래의 세계에 있어서 감당할 수 있는 때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을 추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예수님은 생활과 생애노정에 있어서 이상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출장을 가서 책임 수행을 다 했을 경우에 이미 갔다 온 출장을 다시 간다면 그 사람은 바보일 것입니다. 출장 갔던 일이 성사되지 못했을 때는 자신이 못 가면 다른 사람이라도 추천해서 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 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생활적인 면과 이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 받아 만민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생활의 기틀을 세워 놓지 못하고 갔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불쌍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불쌍한 생활권내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쌍한 생활권내에서 허덕이며 이상적인 역사의 종점을 향하여 바람 부는 대로 따라가는 부평초와 같은 집시의 행로를 피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바로 기독교의 역사요, 그런 무리가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비참하였는가를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