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집: 하나님의 소원과 우리의 소원 1967년 12월 3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08 Search Speeches

축복의 날의 의미

이 날은 예수님에게는 제일 기쁜 날입니다. 제일 슬프게 출발한 예수님이기에 그 슬픔보다 더 큰 비중의 기쁨이 와야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죽음을 넘어서 2천년만에 비로소 가슴에 맺혔던 한을 풀어 놓고 웃으며 춤출 수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할 말은 많지만 너희들이 감당치 못한다면서 얼마나 많은 사연을 품고 갔습니까? 춤을 추는 예수님, 얼마나 기뻐야 예수님이 춤을 추시겠습니까? 처녀 총각이 시집 장가 가는 만큼이나 기쁜 날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한 생명의 가치가 우주보다도 크다고 했으니 이렇게 큰 생명의 가치를 한꺼번에 재물로 바친다고 이런 날이 구현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벌써 다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탕감조건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날은 예수님과 성신이 해원성사하는 날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까지 몰리고 쫓겼던 선한 사람들, 혹은 각 나라에서 몰리고 쫓기고 참살(慘殺) 당했던 하나님의 충신 열녀 효자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선해라. 착해라, 악한 자리에 가지 말고 선한 자리에서 죽어라, 선에 입각하여 살아라' 하고 말하던 사람들, 또한 생명을 걸어 놓고 충·효·열의 길을 가다가 죽어간 사람들, 그들이 소원하던 것이 이 한 날로 말미암아 해원성사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존재세계에 인연된 모든 것이 이날을 위하여 빚을 갚기에 수고하였고, 이날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청산되기를 고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얼마나 기쁜 날이겠습니까? 손 하나를 잘라도 아픈 줄 모르고 목이 잘려도 웃으며 죽어갈 수 있는 날입니다. 천상천하에 이런 날이 시작되는데, 그 이상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날이 지상에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어느누구도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슬픔과 한을 풀어 달라고 예수님과 성신을 붙들고 기도한 줄만 알았지, 하나님께 이렇게 딱하고 처량하고 비참한 사연이 맺혀 있었다는 것을 알기나 했습니까? 통일교회에 들어왔으니까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배만 채우고 자기의 욕심만을 위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얼굴을 들 수 없는 빚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성혼의 날을 고대하는 아버지 앞에 어떻게 서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까? 그 아버지는 최후의 자리를 넘어선 승리의 왕자로서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함빡 안기는 아들딸을 얼마나 그리워했겠습니까? 그 아들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 그러한 아버지 앞에 나아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내 자신의 초라함과 부족함과 불충스러움을 생각하면 몸둘 바를 모르겠고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죄의 보따리를 짊어진, 죄의 주식회사와 같은 자신이니 우리는 천상에 진 빚이 얼마나 큰 줄 알아야 합니다. 천번 만번 죽어 제물이 되더라도 또 다시 살아나서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야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버젓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요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던 그 심정을 알아야만 됩니다. 온 우주가 소용돌이치는 이 마당에 있어서 전세계가 멸망 속으로 매도되려는 찰나에 놓여 있는 그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까딱 잘못하면 모든 역사가 어긋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 비참하게 죽는 것은 괜찮지만 4천년간 그렇게 고대하고 수고하신 하나님을 2천년이나 더 고생시켜 드려야 할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것이 났다는 그런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던고? 회개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신부가 되겠다고 하니, 마치 강도 같은 심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