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집: 나의 뜻 1983년 05월 08일, 한국 본부교회 Page #208 Search Speeches

몸 마음의 하나된 나를 세우지 않고" 내 뜻이 -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한민국의 주체성 확립' 그러는데, 주체성 확립이 뭐냐? 대통령을 중심삼은 주체성 확립이 민족이 천년 만년 요구하는 주체성 확립의 자리와 일치하느냐, 안 하느냐? 일치 안 하게 될 때는, 민족이 천년 만년 원하는 주체성 확립의 전통적인 기준 앞에 일치되지 않을 때는 시대적 과정에서 대통령이 주장하는 주체성은 여지없이 끽!' 날아간다 이겁니다. 그런 주체성은 암만 해도 필요 없어요.

그러면 대한민국 역사가 필요로 하는 주체성을 모든 세상이 오케이 하느냐? 천주가 오케이 하느냐? 아니예요. 세계가 갈 수 있는 영원한 주체성의 정착지는 어디냐 하는 것이 문제예요. 대한민국의 주체성이 영원하다고 해도 그 주체성은 보다 큰 천주·우주 ·세계가 가는 주체성 앞에서는 이동해야 되는 거예요. 그 주체성하고 세계가 가는 주체성하고 하나님이 바라는 주체성이 상치되지 않고 일치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들의 주체성을 논하기 전에 하나님이 거동할 수 있는 주체성은 뭐냐? 이런 문제가 큰 문제라구요.

뜻의 본연의 자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출발의 자리인 것입니다. 뜻의 본연의 자리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곳은 만유의 모든 단계를 초월해 가지고 사방에서 측정하더라도 자기의 위치가 몇 도라는 것이 확실히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틀리게 될 때는 모든 것이, 내가 볼 때 180도인데 그 원점 기준이 다른 데에 가 있으니 돌려서 맞추기 전에는 180도를 찾을 길이 없는 겁니다. 그러한 결과에 부딪쳐 있다 하는 것이 역사과정이 타락권 내에 있다고 하는 이 개념 아래에서는 불가피한 결론이 아니겠느냐.

사방으로 나를 조준해 가지고 영점자리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찾는 데는 본연의 영점자리를 중심삼고 원기의 모든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그 이론에 일치시킬 때 나도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 사실을 찾기 전에는, 우리 자체가 제2의 결과적 존재로서 출발할 수 있는 뜻의 일치점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맞다 이거예요. 이의가 없다 이겁니다. 이거 알겠어요? 「예」

내 마음이 출발해서 움직일 때, 혹은 '전도하자' 할 때, 원해서 하는 사람이 있고, 그저 그래서, 마지못해서 하는 사람, 죽을까 두려워서, 무서워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 환영해서 하느냐, 마지못해서, 죽지 못해 할 수 없이, 무서워서 하느냐? 어떤 거예요? 그것은 다 낙제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몸과 마음이 주체와 대상이라면 그 환경 여건이 상대의 뜻에, 상대형 자리에 일치하게 될 때는 기쁨으로 출발하는 겁니다. 슬픔으로 출발하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기쁨으로 출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쁨의 내용이 첫번이지 슬픔의 내용이 첫번이 아니예요. 타락은 뭐냐? 슬픔의 내용이 첫번이고 기쁨의 내용은 시작도 안 했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복귀의 운명길을 찾아가는 우리로서는 뜻을 기쁨의 내용으로 출발해 가지고 기쁨의 과정으로 소화시켜 나와야 됩니다.

그러한 내가 되어서 보는 눈이 변치 않고, 듣는 귀가 변치 않고, 일년, 십년, 일생 동안 변치 않고 가 가지고 죽더라도 '나는 변치 않고 뜻의 길을 걸어왔으니 너도 변치 않는 뜻의 길을 가라'고 유언할 수 있는 어버이가 되어야 합니다. 친구가 있으면 친구에게 '이렇게 뜻의 길을 불변으로 가는 것이 원칙인데, 너는 왜 그러느냐? 불변의 뜻의 길을 가자'고 권고하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아내와 남편, 그런 아들과 딸을 가져야 됩니다. 왜? 그 과정이 개인에서 천주 과정까지 단계가 많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그런 남편이 필요하고, 그런 아내가 필요하고, 그런 자식이 필요하고, 그런 부모가 필요하고, 그런 일족이 필요하고, 그런 형제가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오색 인종으로 구분된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세계적인 인류의 뜻의 길이 닦아져야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이론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필히 그걸 바란다는 겁니다. 그럴 수 있는 나를 바라는 거예요.

나를 찾아 세우지 못하면 내 뜻이 어디 있어요? 안 그래요? 여기 문 아무개가 있지만, 문 아무개란 사람은 내가 아니예요. 문 아무개는 이름이예요. 팻말이예요. 그러므로 안팎으로 뜻을 중심삼은 마음과 몸이 하나된 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본연의 뜻과 일치된 자리에서, 상대적 기준이, 대상의 위치가 결정된 그 자리에서 출발이, 혹은 동작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런 나예요.

박공서, 여기 와 앉았구만, 그래 뜻이 중요해, 뜻을 중심삼고 하겠다는 극(劇)이 중요해? 「뜻이 중요하지요」 뜻이 중요하지요? (웃음) 박공서의 뜻의 출발점이 어디야? 극이라는 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출발의 기점을 삼았어? 내가 묻는 게, 극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이 뜻길이냐는 거야? 그것은 하등의 관계 없는 거야. 뜻을 위한 효과라는 것이 사람도 없이 나오나? 자기 혼자 되나? 환경도 없이 되어 나오나? 뜻은 강제로 안 된다구요. 자연적인 환경, 순리적인 환경에 그것이 척척 접어져 가지고 앞놓아 나가면서 그렇게 돼야 세상에 발전적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모순과 상충이 없이 소작용은 대작용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런 걸 보게 될 때, 문제가 크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