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집: 참된 사람과 죄 1973년 08월 0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09 Search Speeches

예수가 참된 아"의 사명을 다 했"가

이렇게 볼 때에,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메시아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을 이야기하는데, 예수가 이 땅 위에 와서 완성했소? 완성했어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 위에 와서 사명을 다 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지금 선생님의 말씀을 두고 볼 때 예수가 이 땅 위에 와 가지고 완성했어요? 책임 다 했어요, 못했어요? 이건 이론적으로 볼 때 못 했다구요.

언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나설 수 있었어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었어요? 사랑하지 못했다구요.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었는데 '야야, 너 죽어서는 안 된다' 하고 죽을 사지에서 끌어내어 가지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아들이 왜 못 되었느냐? 이것은 탕감노정에 있어서 아직까지 죄에서 벗어나야 할 운명에 서 있기 때문에, 참된 아들의 자리에 못 나갔기 때문에 그를 해방시킬 수 없는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죽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이론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덮어놓고 믿어서는 안 된다구요. 안 그래요? 하나님이 진정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 보낸 그 아들이 죽는데 얼굴을 왜 돌리느냐 이겁니다. 세상에 그런 부모가 어디 있어요. 우리가 그런 부모를 믿었다가 천국갈 수 있어요? 보장받을 수 있어요? 예수의 소원까지도 이루어 주지 않는데, 예수의 그 간곡한 기도까지도 들어 주지 않는데, 아들을 죽을 자리에 내보낸 그런 입장에 선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천당 가겠다 할 수 있어요? 천당갔다가도 되돌아선다구요. 그런 하나님은 믿을 필요가 없다구요.

그럼 왜 그랬느냐? 여기에는 우리 인간들이 모르는 내적 단계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까지 최후의 탕감노정…. 병난 사람을 수술해 가지고 살리려는 사람은 그 병난 사람을 수술하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 병자를 더 사랑해야 됩니다.

아직까지 병이 나 가지고 썩어져 가는 이 죄악된 세상을 완전히 구원하기 위한 책임을 짊어진 입장, 즉, 구원의 짐을 짊어진 자리에 섰기 때문에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고 갔다는 거예요.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동네방네 쫓기고 몰렸겠어요? 가정에서 몰리고, 동네에서 몰리고, 나라에서 몰리고, 교회에서 몰렸겠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놨겠어요? 참된 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 있느냐는 겁니다. '나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내가 물어 볼께요.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역사적으로 복잡한 내용이 지그재그 엉킨 것을 풀어 가지고, 그것을 다 시정해 놓기 전에는 참된 아들이 안 나오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복잡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능력이 많으시지만 엉클어진 것을 그냥 그대로 풀어 가시는 입장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푸는 데는 하나님이 풀 수 없다구요. 인간이 풀어야 됩니다. 인간이 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자리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도 대신 탕감 제물삼아 가지고 그것을 연장시키는 작전을 해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연장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참된 남성인데 하나님이 진짜 참된 남성을 한번 만나 봤느냐? 예수님을 보게 되면, 이 모든 과정을 거친 남성이 됐어요? 못 됐기 때문에 못 만나 봤다구요. 죄인이 되어간 거예요. 신랑이 되겠다고 허덕이다 죽어간 예수는 만났지만, 신랑도 못 됐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이 땅에 와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자리를 대신하여 해와와 같은 누이동생을 지극히 사랑할 수 있는, 형제를 지극히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섰느냐? 그런 자리에 못 섰다구요. 예수의 동생들이 예수를 비난하지 않았어요? 요한복음 7장에 보라구요. '아 형님,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여기 시골뜨기 모양으로 있어서 되겠느냐? 어서 사람들을 만나 가지고 선전하지' 이러지 않았어요?

예수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못 섰습니다」보라구요. 어머니와 동생들이 제자들 앞에 와서 예수를 만나자고 할 때, 제자들이 보고하기를 '선생님의 동생들과 모친이 와서 찾나이다' 할 때 예수가 뭐라고 했어요? '내 모친과 동생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모친이요 동생이다' 했어요. 그래 뜻대로 했어요, 못 했어요? 여러분 덮어놓고 믿어 가지고는 안 되는 거라구요, 주먹구구식으로.

예수가 오빠 되고 싶은 마음, 오빠의 사랑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좋아할 수 있는 자리에서 그 사랑을 해봤느냐? 어때요? 해봤어요? 우리부인들, 해봤어요, 못해봤어요? 못 해봤던 겁니다. 예수의 누이동생이 있었을 거라구요. 그렇지만 사랑을 못 해봤다구요. 동생들을 사랑 못 해봤다구요. 사랑을 하고 싶었지만 사랑을 줄 수 없거니와 받을 수 있는 동생이 못 되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형제를 사랑하고 난 후에 아담이 가야 할 운명의 길은 어떤 길이냐? 남편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독차지하고 난 후에는, 그 외에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으로서 영육을 표준해 가지고 영원한 사랑을 계약할 수 있는, 참된 부부로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가주(家主)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가 가주가 되었어요? 못 되었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