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집: 우리의 책임 1972년 06월 0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07 Search Speeches

아무도 몰랐던 예수의 처지와 내정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 그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 개인만을 중심삼은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개인적인 자리임과 동시에 그 시대에 있어서의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대표한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 시대 전체를 대표한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의 중심이 됨과 동시에 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이었음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자리는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이스라엘을 남겨 오던 전체 소원의 입장을 대표한 자리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가 연결되는 미래의 세계에 언제나 중심의 한 터전으로 남아져 가지고 그 중심과 더불어 일치되는 자리를 연결시키지 않고는 하나님이 임재할 수 없는 중심적인 자리도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가 소망하던 것은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를 하나님의 뜻 앞에 봉헌하기를 바라던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었던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 소망하던 그 예수의 뜻이 그 민족과 더불어 혹은 유대교와 더불어 하나되어 가지고 이루어져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것이 서로 엇갈린 자리에서 유대교는 유대교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대로, 예수는 예수대로 나뉘어짐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을 오늘날 그 어떠한 신자들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만이 알았고, 예수님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연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길러 준 마리아면 마리아, 부모면 부모, 형제면 형제들이 그 예수의 슬픔을, 예수를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는 그 내적인 슬픔을 알고 있었느냐?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있었지만, 예수가 품고 있는 내정(內情)의 뜻을 알고 길을 닦아 주며, 그가 당할 수난의 길이 있으면 먼저 그 수난의 길을 가려가며 그 수난을 방지해 주려고 한 부모였느냐 하면 그러한 부모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형제가 있었느냐? 그러한 형제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교회나 혹은 나라가 있었느냐? 그러한 교회도 나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마저 그런 입장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그 외에는 일체의 누구도 예수의 입장을 지켜 줄 수 있는, 그가 당하여야 할 수난길과 해결해야 할 어려운 길을 책임지고 대신해 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따르고 있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수제자들마저도, 즉 지상에 제1차적인 소망의 터전을 희망하면서 3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길러 나오고 인도해 나오던 제자들마저도 예수를 배반하는 입장에 섰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인간세상에서는 예수가 당하고 예수가 느끼고 있는 그 내정을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에 예수를 보낼 때, 죽기를 바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와 더불어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통일적인 무리를 갖추어 가지고, 온 세계를 대표하여 승리의 환성과 더불어 하늘의 개선가를 봉헌해 드려야 할 입장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맞아야 할 백성을 잃어버리고, 교회와 가정과 형제를 잃어버리고, 더더욱 이나 제2의 소망으로 세웠던 제자들마저 전부 다 잃어버리고, 생각지 않은 십자가의 운명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하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길을 가는 예수 앞에 그 누구도 그의 사정을 알아줄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하늘이 있다면 하늘은 예수의 사정을 알아줄 수 있는 입장이었느냐 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하늘이 그 사정을 알아줄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런 자리에 서게끔 보낸 것이 아니라 그런 죽음의 길을 당해서는 안 되는 입장에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가 반대의 결과로 나타나는 그런 면을 대하는 하늘은 진심으로 예수를 맞아줄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최후의 울부짖음인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이 말씀에는 지극히 비참한 내용이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스며드는 고통, 그 고통과 더불어 북받쳐 오르는 한의 사무침은 자기 부모에게 미쳐질 것이고, 자기의 친척과 이스라엘 교단과 이스라엘 나라에 미쳐짐과 동시에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에 미쳐질 수 있는 것이 되었지만, 그것을 전부 자기 스스로 제압해 버리고 잊어버려야 할 예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 앞에 책임 못 하고 가는데 대하여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버리시는 하늘의 마음을 도리어 동정을 하면서,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내정까지 생각하며 하늘 앞에 버림받는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늘이 자기를 생각해 주는 일면을 느낀 예수는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하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하늘이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만, 즉 형제들과 이스라엘 교단과 이스라엘 나라와, 로마제국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자기의 입장을 그래도 하늘이 기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예수는, 그 환경에서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입장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자기 하나를 중심삼고 해결될 문제가 사방으로 엇갈려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동정을 바라기보다는 도리어 하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는 누구보다도 고독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