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집: 빚 1975년 03월 3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44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십자가의 길도 달가이 가신 예수님

이런 걸 생각해 보게 될 때. 만일에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건 뭐 할 수 없다구요.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망각하는 입장이 아니면 이 길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과연 하나님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왔다면 그것은 누구 때문에 한 것이냐?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고 있으며 당하고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때문이냐? 인간 때문입니다. 그 인간이 누구냐 할 때에, 이것은 인간 개개인 전부를 위한 것이 아니냐. 오늘날 수십억의 인류가 있지만 그 수십억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을 위할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게 된다면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를 붙들고 그래도 우리를 놓지 못하고, 그런 수난길에서 이것을 놓지 못하고 끌고 가고 돌이키려 하는 그러한 분이 있다면, 그러한 분이 사실 세상에 있다면 그 얼마나 고마운 분이냐. 그 무엇으로 감사를 드려야 될 것이냐? 세상에 그런 사람도 없겠지만 만일 있다면 이건 무엇 가지고 그 감사를 드릴 것이냐?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로 말하면 예수가 이 땅에 올 때까지, 예수라는 그분이 이 땅에 왔으면 그 예수를 내세울 때까지의 하나님의 수고가 컸을 것입니다. 얼마나 컸겠느냐 이겁니다. 비로소 이 땅 위에 메시아로 보내졌던 그 예수가 자기의 소원성취의 대표자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결정하고, 또 그러한 내용을 갖추어 내세웠고, 그러한 수고를 거친. 그 수고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중심존재라고 내세웠을 때에. 예수를 중심삼고 민족이 받들어 드리고, 인류가 하나되기를 바랐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반대하고 죽음의 자리까지 몰아넣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한다면 수천 년 동안 참아 나오고 극복한 그 원통스러운 마음을 일시에 그 민족에 대해 퍼붓고 싶은 생각이 안 났겠느냐. 또.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운명에 부딪힌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했을 것이냐. 그래도 분풀이를 하지 않고 또 다시 묵묵히 구원이라는 섭리를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내적 고충이 얼마나 컸겠느냐. 우리 인간들이 이런 것은 생각지 않아요.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게 될 때,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 예수는 그래도 역사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했는가 하는 이면을 생각했던 입장인 것을 우리는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나 하나의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고 나서기에 참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자신을 중심삼고 비참한 것보다 역사적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그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범위가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알면 알수록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동기도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예수 자신을 이 땅에 내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4천 년이면 4천 년 역사시대를 통해 수많은 수난길을 극복해 나왔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건 누구 때문에 한 것이냐? 자신은 물론 인류를 대표했지만, 인류를 대표해서 구세주로 왔지만 예수는 '내 책임을 세워 주기 위한 것이다. 내 사명을 이루어 주기 위한 것이다. 나를 위한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될 때에 거기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 그 책임 앞에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감수하면서, 책임 수행을 감당해야 할 의무감을 갖게 될때 십자가의 길도 달갑게 갈 수 있었을 것이 아니냐.

결국은 자기 생명을 바치는 자리에 나가더라도 역사적인 하나님을 알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이면적인 심정을 더듬어 위로할 수 있는 그 길을 찾으려고 했고, 그 길을 가려고 했던 예수를 바라보게 될 때, 인류역사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마음 가운데서 지금까지 참아 왔고, 지금까지 무지한 인간들을 인도해 왔지만 비로소 오늘에사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아주고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하나의 희망적인 소망의 빛을 바라봤을 것이 아니냐.

거기서 예수가 뜻을 이룰 수 있는 길로서 민족을 수습하고, 로마를 수습해서 세계적인 판도를 확장했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셨을 것이냐.

그 판도를 넓혀 가면 넓혀 갈수록 그 판도를 넓히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수고한 것을 갚기 위한 것이다. 마음이 아팠던 것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상처가 있었던 것을 지워 주기 위한 것이다' 하는 입장에 섰다면, 그 예수를 통해 하나님은 비로소 해원성사, 분했던 것을 풀 수 있는 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푼다는 것은 반대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