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집: 신앙과 현실 1973년 03월 18일, 미국 벨베디아수련소 Page #40 Search Speeches

섭리사의 인물"은 모" 문제"을 어떻게 해결해 "나

그러면 그 사람들이 생활하는 과정에 있어서 어떤 길을 걸어 왔느냐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현실문제와 부딪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고 언제나 상충적인 현실을 가졌던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럴 때에는 반드시 하늘을 세워 가지고 하늘이 결정하는 그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한 대표자들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러한 책임자들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섭리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핍박과 어려움이 점증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이 취해 나간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언제나 환영받는 자리가 아니라 핍박받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독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상대해서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런 환경을 갖는 것 보다도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신을 대해서 말하는, 이런 놀음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구요. 또 그다음에는 외적으로 무슨 물질문제라든가 이런 문제에 부딪치게 되거나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좁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하늘과 더불어 의논하고 해결하고 싶은 마음, 거기에 하늘이 동기가 되어서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어 있었던 거라구요. 그 다음에는 외적인 환경에 있어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인식의 문제라든가 실제 문제에 있어서 전부 다 협소하여 막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모든 문제를 하늘과 더불어 의논하고, 하늘을 통해서 그것이 인식되고, 하늘을 통해서 그것이 해결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던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에 따라 전체를 신과 더불어 일체화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게끔 환경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실제적인 상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상대로부터 모든 것을 저버림받았기 때문에 하늘을 대함에 있어서도 실제 상대를 구하는 것 이상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나서게 되고, 실제 생활을 중심삼고 생활하는 것보다 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대해서 생활하고 싶고, 생활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몰려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 문제는 점점점점 좁아지기 때문에, 하늘을 중심삼고 현실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점점점점 자기의 고독을 넘어서 하늘을 희망삼아 현실 문제를 포괄할 수 있고, 기쁨을 느낀다든가 자기의 중심적인 가치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좁혀져 들어간다고 해서 낙망과 절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낙심과 절망을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불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천지만물을 지을 때, 본래 어떤 자세를 가지고 지었느냐하면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상대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그런 핍박, 그런 좁은 절정에 임하게 될 때에도 내자신의 마음에 평화와 감사와 기쁨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상대될 수 있는 여건이 되느냐 못 되느냐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점에서부터 하늘은 우리와 관계를 맺고 출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중세에 있어서 청빈한 생활을 한 대표자로서 프란체스코(Giov-anni Francesco Bemardone)라는 양반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청빈을 주장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어려운 생활, 외적인 환경에서 몰린다고 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슬퍼하고 고통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느꼈더라면 하늘의 뜻을 이어받을 수 없었지마는 그 고통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고통 가운데서 희망을 갖고, 고통 가운데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그러한 입장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이 협조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를 우리가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세계의 엇갈린 중앙에 섰다는 것을 언제나 깨달아야 된다구요. 실제 문제가 엇갈린 것이 점점점점 초점에 가면 갈수록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노아와 같은 양반에게도 그 환경이 반대하고 나중에는 가정 전체가 반대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120년이라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전부 다 부정한다 하더라도, 그걸 다 잃어버리더라도 다 가진 것 이상의 소원을 하나님과 더불어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현재에 자기가 축복의 기대를 갖고 있는 이상의 기준을 세우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그런 과정을 거친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은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게 되면, 그는 30대청년으로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그러니 그 동네라든가 어디를 다니게 되면 사람들이 그를 흉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평을 하려면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딪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딪치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그 환경을 극복해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문제로 삼은 사람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