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집: 상봉의 기회 1971년 06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03 Search Speeches

주류와 하나 되어야 할 인간

인류가 모여 있는 곳에는 나라도 있습니다.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선진 국가도 있을 것이요, 후진 국가도 있을 것입니다. 또 거기에는 수많은 종파도 있을 것이요, 수많은 종파 가운데에 수많은 종교인도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인들 가운데는 역사의 배경과 문화의 배경이 다르고 환경의 여건이 다른 입장에 서서 고민하면서 소망을 품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기뻐하면서 그 소원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될 때에, 세계 인류 개개인이 공히 찾아야 할 하나의 목적은 '이것이다' 할 수 있는 어떤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세계의 수많은 가정들은 '이렇게 가야 된다' 하는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종족이면 종족, 혹은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는 '이렇게 가야 된다' 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국가들이 합한 세계도 '기필코 이 길을 가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결정적인 한 코스가 있을 것입니다.

이 코스는 수많은 지류(支流)가 모아져서 하나의 본류(本流)를 이루어 그것이 대해(大海)로 들어가는 어귀에 이르게 될 때에 전체가 한 곳으로 흘러 내려가는 코스와 마찬가지입니다. 한 곳으로 흘러가는 그 코스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야 된다고 하는 절대적인 것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류의 입장에서는 다릅니다. 환경이 다른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쪽으로 흐르지 못하면 북쪽으로 흐를 때도 있을 것이요, 동쪽으로 흐를 때도 있을 것이요, 서쪽으로 흐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지류는 이처럼 그 환경에 따라 동서남북 사방으로 방향을 달리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최후에 대해를 향해 들어가는 어귀에 이르러서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일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방향을 갖춘 강줄기와 대해가 맞부딪치는 그 자리, 역사적 배후나 사정이 천태만상으로 다르다 하더라도 대해와 맞부딪치는 상봉의 자리에서는 한 모양이요, 한 형태로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과거의 소원과 지금의 소원이 다르겠느냐? 혹은, 그 소원이 북으로 남으로 동으로 서로 왔다갔다할 수 있겠느냐? 설령 그렇게 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그렇게 가야 된다는 그 원칙적인 방향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피해 가고, 처해 있는 입장을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원칙적인 길을 가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방향이지 정상적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개인이 바라는 최고의 자리와 민족이 바라는 최고의 자리와 세계가 바라는 최고의 자리가 각각 다를 수 있겠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다를 수 없습니다. 천이면 천, 만이면 만, 과거에 위대했던 사람이나 현재에 유명한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이 바라는 기준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자리를 바랄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를 바라야 되고, 또 그 바라는 기준이 서로 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틀리다면 강물로 말하면 바다로 들어갈 수 있는 강물의 입장이 못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그 환경을 극복해 가지고, 즉 그 환경에 내가 순응할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빨리 넘어서 가지고 최후의 한 점에서 세계 운세를 맞고, 국가의 운세, 민족의 운세, 혹은 가정의 운세를 맞아야 됩니다.

운 중에는 가정의 운도 있고, 개인의 운도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면서 '아, 오늘은 운이 좋았다. 오늘은 재수가 있었다'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러나 아무리 재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재수 있었던 자체만을 보면 좋을지 모르지만 전체를 두고 볼 때에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오늘 이 시간에 좋다고 하는 것이 내 생애에 있어서 영원히 자랑할 것이 못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개인의 생애노정에 있어서 처음 맞는 기쁨의 날이요, 자랑의 한 날이라 하더라도 역사의 방향에 미루어 보고, 역사의 목적과 부합시켜 볼 때에 과연 기쁠 수 있겠느냐 할 때에, 기쁠 수 없는 일이 태반일 것입니다. 방향이 다르다는 거예요.

지류로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흐를 수 있는 환경의 여건을 가졌다 하더라도 동서남북 사방 가운데에 삼방(三方)은 부정받아야 할 입장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최후에 가야 할 방향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인 주류의 전통은 어디로부터 연결될 것이냐? 지류 중에는 흘러오면서도 주류에 가까운 방향을 따라 흘러오는 지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지류 가운데에서 제일 가는 지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니예요? 대해로 들어가는 방향과 일치되어 가지고 흘러 나가는 주류가 있을 것입니다. 지류 가운데에 주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주류가 전통적 내용을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체적인 표준이 될 것입니다.

개인이 가는 데 있어서도 그런 주류와 같은 어떤 형태, 즉 표준적인 형태와 만나게 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개인에 있어서는 그 주류를 만날 수 있는 때가 대해로 들어가는 때인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어떤 큰 희망을 가졌다면 그때가 그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계기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그런 주류와 상봉할 수 있는 지류가 있다 할 때에, 그 지류가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여야 되느냐? '그 자리는 일생동안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자리다. 찬양할 수 있는 자리다' 이렇게 찬양하며 갈 수 있는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올바로 간다는 것을 알고 가는 사람들이 있느냐? 그것을 안다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만날 때도 모르고 만나고, 또 만나 가지고 그렇게 따라 흘러가면서도 그 흘러가는 자리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는 지금까지 미지의 과정을 거쳐왔고, 또 미지의 목적을 향해 가고 있는 서글픈 역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과정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숱한 고빗길을 거치면서 방향을 맞춰 대해까지 나온 것입니다. 그 흘러온 곡절이 길면 길수록 흘러나오는 과정에서 인연되었던 때, 인연 되었던 사연, 그 기회, 상봉의 때는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 때를 얼마나 가치 있게 느껴 봤고, 그 자리에서 얼마나 기뻐했고, 그 때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대해 보았느냐 할 때, 그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