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집: 이상상대 1967년 10월 16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33 Search Speeches

참을 위해 고생하고 희생하"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 사람

생각해 보라구요. 사정을 바꿔 생각해 봐요. 나도 그런 거예요. 나도 여러분들을 대해 척 보게 될 때 말이예요, 아무리 얼굴이 잘나고 아무리 모든 것이 훤하다 하더라도 그가 뜻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느냐 하는 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 길 가운데 있어서 같이 눈물 흘리고 같이 동정하면서 하늘의 소원, 하늘의 해원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가지고 걸어왔던 그 사실은 내가 죽더라도 못 잊는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이제 앞으로, 명년서부터는 간부 가운데서 선생님하고 같이 고생한 사람들, 옥중에 들어가서 고생한 사람들을…. 이런 사람들은 별로 공적이 없지만 말이예요, 그때 심정으로 볼 때 그것이 절정에 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예민한 첨단에 서 있을 때이기 때문에 그때 한마디의 위로는 천추의 위안을 깃들게 해줬습니다. 그때의 한마디 권고가 사지에서 새로이 용솟음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시절의 사람들을 먼저 도와줘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피난생활 할 때에 있어서 말이예요. 그 이름도 안 잊었어요. 피난생활 할 때에 있어서, 그는 통일교인도 아무것도 아니예요, 우리 동네에서 먼 데 있는 나를 아는 사람인데 길거리에서 나를 만나 가지고 그때 돈으로 만 원을 주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10만 원이든 100만 원이든 갚아 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선생님이 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른편 강도에게 '너와 나는 오늘 낙원에 같이 이르겠다' 한 그 말을 그런 심정에서 볼 때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충분히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통일교회가 핍박받는 것은 선생님이 핍박받는 것을 통해 통일교회 운명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핍박받는 거예요. 핍박에 같이 밀리고 부대끼고 울고불고 이랬다는 사실은 여러분들이 선생님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 눈물, 그런 수고의 터전이 민족 앞에 심어져 이 민족이 뗄 수 없는 전통의 기반으로서 남아지게 됐다는 거예요. 앞으로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창건을 해야 되겠고, 이 전통적인 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건해야 된다 이거예요.

요즘에는 선생님이 강가에 쭉 가 있었지만, 선생님이 '일생을, 21년 노정을 청산짓는 기간에 제일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봤어요. 그가 지금 선생님을 반대하고 뜻 앞에 떨어져 있다 이거예요.

어떤 사람이냐? 감옥에 들어갈 때 참 자기의 생명 재산을 다 던지고 떠나던 그 순결한 사실, 그 사실만은, 그 사람은 없어졌지만 그때 그 사실만은 잊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선생님의 뇌수에서 뗄래야 뗄 수 없다는 거예요. 세상 풍조에 부대끼면서 거기서 그걸 극복 못 해 가지고 환경에 몰려 가지고 뜻에 배치되고, 선생님의 뜻을 배반하고 나섰지만서도 그 사실만은 어떻게 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붙들려 갈 때 애절하던 그때의 음성, 몸부림치던 그 정경을 암만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이게 고통이예요. 생각하자면 일면에서는 고통이예요, 고통.

그런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었으면 얼마나 역사에 빛날 것이냐 이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생각해 볼 때 걱정이라구요.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이냐? 그러한 사람들을 처리하지 못하면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서 잘못한 사람들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되느냐? 이런 문제가 선생님이 지금 하늘 앞에 해결지어야 할 중대한 문제예요.

내가 이 땅 위에 와 가지고 뭇사람의 생명을 구해 주기 위한 것이지, 나라는 사람이 이 땅을 거쳐가게 될 때 나로 말미암아 피해받는 애혼이 있어 가지고 슬픔의 한을 천상세계에 지니고 간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전체 복귀섭리를 중심삼고 볼 때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참 복잡하다는 거예요.

그걸 보면, 정성들였던 그 모든 기준이라는 것은 그 사람 것으로 남아지더라 이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그때에 정성들인 비중과 오늘에 있어서 반대한 그 피해의 비중을 비교해 볼 때,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 몇몇 식구들을 가로막았을는지 모르지만 그때 내가 식구를 하나도 거느리지 않았던 외로운 때에 있어서 심정적인 기준 앞에 그들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동정의 인연이 거기서 깃들었고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심정과 전체적인 사연이 거기서 움직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배후에 활동한 그 기준이 너무나 큰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을 무시하면 하나님 앞에 미안한 생각을 안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볼 때에, 아, 인간은 참을 위해서 고생하고 참을 위해서 생명을 거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이로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 일대에는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3대를 거쳐 아담의 후손, 소생 장성 완성 복귀의 역사를 거쳐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이런 원리적인 배경을 들고 나와 가지고 3대 이내에 용서할 수 있는 일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참을 위하는 남 모르는 눈물과 남 모르는 희생은 영원한 보화를 지닌 것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