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집: 하늘은 우리들을 부르고 계신다 1958년 01월 0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50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해원을 위해 고통받은 선조"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던 서러운 심정을 해원하기 위하여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를 불러놓고 120년 동안 염려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안 자가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해원의 한날을 위하여 120년 동안 염려하시며 노아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안 자가 땅 위에 없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가운데 아담·해와를 잃어버리시고 서러워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눈물 없이는 대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복된 자리에 머물러야 할 아담이 하나님의 품에서 추방당하게 될 때에 느끼셨던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체휼하는 자가 이 땅 위에 있다면 그는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서러움은 아담의 타락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한이 맺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자체를 대하여 이 시간도 해원하시며 한서린 호소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뼈와살, 몸과 마음에 사무치도록 울고 울어도 한이 없고, 서글퍼하여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선지 선열들,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섰던 조상들 가운데는 서글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섰던 사람은 고통의 길을 피하여 가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야곱도 그랬습니다.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민족을 대표했던 모세도 그랬고, 세계를 대표하여 왔던 예수, 즉 만민의 구주(救主)였던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이 서러워하시는 대로 서러워해야 되겠고, 하나님이 통분해 하실 때 같이 통분해야 하겠습니다.

아담·해와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기들만을 중심한 기쁨을 찾아가려고 했던 사실이 역사노정에 슬픔의 조건으로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슬픔의 땅이 어디에서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느냐 하면, 아담·해와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천륜(天倫)을 망각한 자기위주의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슬픔이 어디서 부터 비롯되었느냐 하면, 인간이 하늘의 슬픔을 망각하고 하늘의 통분 함을 망각하며, 자기 일신의 만족과 안일을 찾아나온 데서부터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과정에 왔다간 선지 성현들의 눈물의 결정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곤고와 비통 속에 있는 하늘의 대신자가 되어서 하늘의 슬픔과 분함과 억울함을 알아 악을 대하여 싸워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를 옹호하고 예수님을 옹호하고 역사적인 선지 성현들을 옹호하면서 하늘을 위로해 드리는 사명을 완수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러한 사람을 찾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와 성신, 그리고 이땅에 왔다간 우리의 모든 선조들도 이런 존재를 찾아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생애 노정 가운데 하늘을 대신하여 곤고한 입장에서 만민의 배척을 받고 조롱을 받은 것이 몇 시간이었습니까?

타락한 인류는 슬픈 운명의 역사적인 노정에 처해 있는 고로 하늘을 찾아가는 사람은 이러한 길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세계의 철칙(鐵則)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과정에서 슬퍼하는 자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섭리의 뜻을 펴시는 동안 아들딸이 악한 세력한테 유린당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통분해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슬픔 속에 계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루속히 슬픔과 비통과 분함에서 벗어나 기쁨의 날을 맞이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소망인 것을 알아야되겠습니다.

인간 타락 이후 6000년의 역사가 경과했지만 기쁨의 한날을 맞아 하늘의 영광을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아들딸이 오늘 이때까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고로 하늘이 세우신 기독교는 눈물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