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집: 하나님과 나 1967년 04월 1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52 Search Speeches

원리강사가 취해야 할 입장

여러분이 강의하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해야 됩니다. 내가 강의를 하는 데 있어서도 내가 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가 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강의할 때 아무개면 아무개의 입장에서 강의하게 되지 하나님 대신이나 선생님 대신 하지 않아요. 그러니 실감이 나요? 실감이 나냐 말이예요? '이런 투쟁을 할 때 이런 고통이 있고 이런 무엇이 있을 것이다' 하는 그런 실감이 들어오느냐 말이예요. 어때요, 실감이 나나요, 안 나나요? '뭐 나겠으면 나고 말겠으면 말고…' 하지요. 거기서는 하나님이 역사를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맨 처음에는 말이지요, 원리 말씀보다도 선생님이 가까워요. 그렇지요? 맨 처음에 들어오면 원리 말씀보다도 선생님이 가깝다 이거예요. 그렇지요? 그렇지만 가정을 벗어나거나 교회를 벗어나서 대사회활동을 할 때는 그것 가지고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인 사실을 요구하고 실증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는 데 있어서는 거기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반드시 자기가 활동할 수 있는 조건과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원리 말씀을 중심삼고 할 수 있는 활동의 조건을 제시해야 된다 이거예요. 선생님이 제시 안 되거든요.

이러다 보니 결국은 무엇이냐? 심정적인 모습은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게 탈입니다. 맨 처음에는 전부 다 뭐 교회에 안 오면 안 되고, 안 오면 몸이 이러고, 간절하게 오고 싶고 다 이러던 것을 왜 잃어버렸느냐 이겁니다. 그걸 잃어버려서는 안 돼요. 시일이 가면 갈수록 그것이 더 높아지고 더 두터워져야 됩니다.

그걸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지방에 가서 말씀을 할 때, 말씀으로 인해 이렇게 전체에 창조력을 발휘하는 힘이 희박해져 갑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굴러가고, 자기는 자기대로 남아 있고, 식구들은 식구대로 남아 있다 이겁니다. 이것이 왜 하나로 엉클어지지 않느냐 이거예요. 그것은 원칙에 부합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심정 기준만 갖고 여러분이 말씀한다면 그 자리에는 반드시 하늘이 역사하는 거예요. 그런 심정 기준을 갖고 나가게 되면 식구들이 절대 여러분들을 배신 안 합니다. 절대 배신 안 한다구요. 배신하게 되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지금까지 희생하고 고생하면서 전부 다 지치게 되는 것은 왜냐? 그렇게 중요한 일치점을 잃어버려 가지고 하늘이 역사할 수 있는 안식의 초점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를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이냐? 여러분들이 말씀하는 그 말씀이 옛날과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게 느껴지지 않아요?

맨 처음에 전도 나갈 때는 전부 다 욕을 먹어도 선생님이 감옥생활하고 다 그런 것이 실감이 나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선생님 대신 나가서 싸운다는 실감이 나서 움직이곤 했다구요. 그럴 때 총각이 나가면 그 동네 아가씨들이 밤잠을 못 자고 보고 싶어서 따라오고 그랬는데, 왜 그것이 없어졌느냐? 어디에 문제가 있어서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느냐? 그것을 분석해 보면 그 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무엇을 해도 그 기준만 갖고 나가게 될 때에는 머리를 숙이게 되니까 늘 부족한 것입니다. '아버지, 부족합니다' 하는 겁니다. 오늘도 부족하고 내일도 부족하고, 하늘땅 보기에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욕먹어도 싫지 않고, 체면이고 무엇이고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늘땅 앞에 책임추궁하면 책임추궁당하는 그 감정이 내 체면보다 강하게 들어오니까 하고 나서도 부끄럽다구요.

이렇게 될 때는 자연히 그런 심정을 갖고 있으면 그걸 누가 동정해 주느냐 이겁니다. 누가 동정해 주느냐? 하늘이 동정해 주니까 사람이 동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장들이나 지구장들에게 내가 지금 염려하는 무엇이냐?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강의를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강의를 할 때는 반드시 원리 말씀 자체를 말씀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선생님의 역사를 말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 역사는 결국 무엇이냐? 내가 그 역사를 상속받고 그 역사와 일치되기 위해서 말한다 이거예요. 열 번 하면 열 번 함으로써 깊어지니 깊어진 만큼 내가 심정적으로 가까와지기 위해서 말한다 이겁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남을 구하는 것보다도 내가 가까와지기 위해서 말한다는 거예요. 내 일이예요.

그러므로 열 번 하면 열 번 하는 것만큼 가까와지고, 열 번 하면 열 번 하는 것만큼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만큼 그것이 깊고 폭이 넓어져요. 높아진다 이겁니다. 높아지니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심정 기준에 있어서 자기가 발전하고, 심정 일체를 중심삼은 발전의 도수를 강화할 수 있는 찬스가 생깁니다. 그런 때가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요, 식구를 거느려 가지고 가르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두에서부터 말할 때 벌써 딱 손을 잡으면 그것이 내 손이 아닙니다. 그건 뭐냐? 내 손이 아니라구요. 척하면 내가 아니예요. 내가 아니라구요. 그러면서 전체가 형용할 수 없는 내정적인 그런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몸으로 느껴 나와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입을 열면 자기 말에 자기가 취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면 그 기도는 신비스러워요. 자, 이렇게 쓱 기도하면 그 기도에 자기가 전부 다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를 여러분이 체험해야 됩니다.

그것은 왜 그래야 되느냐? 원리가 그렇잖아요.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으면 힘이 나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으면 심정적인 감흥과 더불어 힘이 나오는 거예요. 힘이 나와서 무엇을 할 것이냐? 심정적인 창조복귀가 이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