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집: 흥망의 분기점 1971년 03월 2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60 Search Speeches

악의 근성과 선의 본성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두움이 찾아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두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위해서 살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벽기도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새벽기도를 못 나와도 좋으니 기도하는 그 시간에 신앙의 동지를 위하여 세 가정의 문전에서 기도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일 분이라도 좋습니다. 이것이 새벽기도를 몇 시간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것이 복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없으면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은 보다 높고, 보다 귀한 자리만 가려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막연하나마 이런 내용을 중심삼고 희생봉사 하라고 강조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흑암이 오는데 희생봉사는 그 흑암을 방비하기 위한 자연적인 교두보요 하나의 요새적인 작용을 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도리를 가르쳐 준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왜 흑암을 막는 길이 되느냐? 사탄의 본질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악의 본질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악의 본질은 어떤 것이냐? 자기를 위하라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있다면 열 사람 전부를 자기의 발 아래 몰아넣고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한때는 따르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 도망간다는 거예요. 도망갈 때는 그냥 가지 않습니다. 빼앗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전부 훑어 가지고 가니까 망하는 겁니다. 떨어져 나갈 때는 전부 다 떼어 가니까 망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올 때마다 가져다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흥망의 분기점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심령이 어두울 때가 있더라도 자기를 중심삼고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내 어둠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남을 위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통일교인 가운데서 누가 제일 불쌍한가를 찾아보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보다 더 불쌍하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 어두웠던 심령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정 방법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결국 남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동조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전의 행보와 더불어 그 방향에 맞추어 같은 형태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리는 남을 위하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고 볼 때, 한의학에서 사상(四象)이 있다는 것과 같이 양질 (陽質)의 사람과 음질(陰質)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체질에는 동 서 남 북과 같은 것이 있고 또 중간 성질의 사람도 있습니다. 전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저 사람 싫어' 하는데 어떤 사람은 '저 사람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데, 다른 사람은 보기만 해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난 여자들도 시집가고 못난 남자들도 장가간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 싫다고 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이지 전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같이 전부 다 일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성을 중심삼고 위하는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를 중심삼고 위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위하는데 있어서 바깥에서 위할 것인가, 안에서 위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깥에서 위하는 자가 될 것인가, 안에서 위하는 자가 될 것인가? 말하자면 사랑받으면서 위할 것인가, 사랑하면서 위할 것인가? 그를 긍휼히 여기면서 위할 것인가, 그에게 사랑받으면서 위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긍휼히 여기면서 위할 것인가, 사랑받으면서 위할 것인가? 그런데 사랑받으면서 위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으면서 위하는 것은 종입니다. 사랑받으면서 위한다는 말이 있습니까? 모양은 위하는 것 같지만 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