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집: 십자가 상에 있는 예수의 고난 1964년 12월 2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33 Search Speeches

부활함으로 말미"아 구원받"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노정은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구원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고난의 열매로써 한을 청산짓기 위한 자리입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떠나서 승리하여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영생의 자리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아 놓았는데,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가? 원통하다고 그럴거예요. 부활의 도리를 믿어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도리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그런 길을 밟고 나온 것입니다.

신부의 도리를 찾아 나가는 우리는 오늘 역사적인 예수의 심정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민족을 부여안고 세계를 부여안고 통곡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슬픈 사정이 있다면 나를 제물로 삼아서 내가 비참한 자리에 나가겠습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여, 내가 그런 각오를 하겠습니다. 아버지여 ! 선조들이 남긴 역사적인 오점을 내가 탕감하고 청산하겠습니다' 하는 부르짖음이라도 있어야만 예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이런 입장에서 '나는 아담같이 안 되겠습니다. 가인같이 안 되겠습니다. 함같이 안 되겠습니다. 제물 실수하던 아브라함같이 안 되겠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2타 하던 입장에는 서지 않겠습니다. 책임 못한 세례 요한의 자리에는 안 서겠습니다. 책임을 완성하는 자리에 내가 서겠습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믿지 못하여 실수한 것을 믿고 넘어가야 합니다. 땅을 적신 피의 호소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인 기준에서 싸움이 벌어질 것을 아신 예수는 '내가 죽더라도 피로써 호소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공적으로 하나님의 분한 역사를 막아야 했던 것처럼 예수도 그에 못지 않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고역 생활을 해야 했던 것처럼 역사적인 원통함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예수는 했던 것입니다.

원래 모세가 아버지라면 아론은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론이 책임 다하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했던 것과 같은 역사적인 모든 실수의 조건을 자기 일신에 걸어 가지고 그 반대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부여안고 넘어가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버린다는 것은 역사를 탕감하겠다는 것이요, 부활했다는 사실은 재역사가 출발한다는 것을 예고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를 탕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자리를 통한 부활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담 가정에 아벨을 세우고, 노아 가정에 함을 세우고, 아브라함 가정에 이삭을 세우고, 야곱 가정에 요셉을 세우고, 모세 앞에 아론을 세우듯이 예수 앞에도 세례 요한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왜? 아버지와 아들이 역사를 망쳤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타락했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부자가 역사를 망쳤으니, 이러한 역사를 복귀하기 위한 쇠사슬을 짊어진 예수는 세계적인 부모의 입장에서 세계 인류의 대표인 세례 요한을 맏아들격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런 후계자가 자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시시한 일로 목을 내놓고…. 그것이 세례 요한의 책임이겠습니까? 그는 유대 관원을 움직일 수 있는 인격자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3년여 동안 도의 생활을 겸비한 사람이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선지자로 또는 예언자로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 세례 요한이 실수하여 넘어지니 할 수 없이 그 대신으로 베드로를 세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례 요한 대신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힘쓰는 자가 얻나니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결판짓는 마당에 베드로에게 '역사적인 선조들의 모든 잘못은 내가 책임질 수 있으니, 너는 아들의 책임을 다해라' 한 것입니다. '아담 가정의 참다운 아벨이 되고, 노아 가정의 참다운 함이되고, 아브라함 가정의 참다운 이삭이 되라. 복귀의 산물인 이 모든 것을 믿는 입장에서 제물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아버지라면 베드로는 믿음의 아들입니다. 아들 만들려고 했던 것이니 베드로가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었더라면 기독교 역사는 이처럼 비참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