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집: 만일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1973년 07월 22일, 한국 중앙수련원 Page #279 Search Speeches

나의 주장은 -어지"라도 하나님이 가야 할 방향은 남아져야 한다

이번에도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이 김포공항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8개월만에 돌아오게 돼 조국강토가 그리웠습니다.

나는 이 민족이 망해서는 안 될 민족인 것을 알아 왔던 것입니다. 이 민족이 분열되어서는 안 될 것을 알아 왔던 것입니다. 이 민족의 정신적인 자세를 지도해야 할 수많은 교파들이 분열되어 투쟁하고 자멸하는 입장에 떨어져서는 안 될 것을 알아 왔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통일교회 식구라는 사람들을 또다시 만나야 했습니다. 이런 마당에서 냉정히 비판해 봤습니다. '너 문이라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생애를 바쳐 가지고 동분서주하고 있느냐? 누구가 그리워하는 길도 가지 못하고 그 누가 좋아하는 길도 가 보지 못하고 일생을 투입하여 이 놀음을 하고 있느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조국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지으면서 기도할 수 있는 이런 마음을 가진 것도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요, 이 민족이 망해서는 안 된다는 자세를 가지고 여러분을 지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딴 것은 없습니다. 선생은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은 남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의 주장은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이 가야 할 방향은 남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777가정의 성혼식을 두고 보더라도 10개 국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을 한국에 몰아들인 그 일은 무슨 쇼가 아닙니다. 쇼가 아니예요. 이것은 생사 지권을 판가리하기 위한 심각한 열전이었다 이거예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걸어 놓고 내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길이었어요. 생명을 걸어 놓고 투쟁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시봉해 나오려는 사람이 여러분이 따르고 있는 이 사람인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일본이면 일본 조야에 대한 문제를 벌써 7년 전부터 염려해 왔던 것입니다. '일본은 기필코 이렇게 될 것이다. 중국도 기필코 이렇게 될 것이다' 하면서 일본 대표자를 내세워 가지고 일본 자민당 내의 간부들과 접촉시키는 피어린 투쟁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건 누구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번 도의원 선거에서 만약에 자민당이 지는 날에는 동경이 공산당의 기지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 문제를 놓고 일본 대표가 전화를 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모략을 받더라도 파수의 사명을 해야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산당과 정면적으로 충돌해서 방어해야 한다' 하고 지시를 했던 것입니다.

일본 사회의 여론이라든가 공산당들은 의기양양해 가지고 '이번에야말로 자민당을 분열시켜 다시는 건질 수 없게끔 땅에 떨어뜨리고 말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기세가 당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었던 것입니다. 누가 그런 일을 했고 어떤 사람이 그렇게 했는지 공산당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말미암아 자민당은 완전히 우리 국제승공연합에…. 그래 가지고 그들이 찾아와서 여러 가지 내용의 진언을 하고 그랬습니다.

이번에 내가 공항에 나올 때도 문선생이라고 하면서 대합실까지 빌려 주면서 나를 추대했어요. 그것을 바라보게 될 때, 까딱 잘못하다가는 일본이 이 놀라운 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아시아를 제패할 수 있는 주도권을 갖게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1971년에 중국은 이러다가 망한다는 것을 예고해 가지고 세 번씩이나 장개석에게 가 가지고 듣기 싫은 말을 한 것입니다. 그건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일본의 구보끼 협회장을 시켜서 앞으로의 중국에 대한 안팎의 전반적인 문제를 검토해서 '중국은 이러한 단안을 내려야 할 때가 왔지 않았느냐. 장개석 총통은 이번이 찬스가 아니냐' 하며 생명을 걸어 놓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면담실 네 구석에 비밀리에 경호관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몰랐다는 거예요. 그렇게 장개석 총통을 공격해 대니까, 그 경호원들이 나와서 체포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런 곤욕을 치러야 할 입장에 있었지만 장 총통이 그걸 무마시켰어요. 그런 과정을 지내는 이런 등등의 문제는 오늘날 뜻이 가야 할 길 앞에 있어서 최상의 대표들 앞에 최대의 노력을 해야 할 배후의 인연을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국을 찾아들게 될 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남북이 분단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통일교회의 강력한 사상을 거국적인 민족정신으로 교육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통일교회가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나왔다'며 별의별 모략을 다 합니다. 1960년대에 내가 미국에 가서 2년 8개월에 해당하는 기간을 머물 수 있게끔 여권 비자를 다 내 놓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기반이 있기 때문에 내가 한국에 안 올 수도 있었어요? 그래 가지고 12년에 해당하는 연한 동안 미국 땅에서 기반을 닦았더라면 방대한 기반을 닦았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무효시켰어요. 자유당이 반대하고, 국가가 협조하지 않는 비운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 민족을 버릴 수 없었던 거예요. 이 민족을 대해서 내가 죽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맹세한 기준까지 해야 할 사명을 다짐하면서 지금까지 싸워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국제승공 연합을 편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지방에서부터 우리의 사상적인 기준을 강화시켜 민족을 단합시키지 않으면 앞으로 위험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우리는 준비해 나왔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