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집: 소망의 조국의 슬픔 1965년 11월 01일, 한국 광주교회 Page #288 Search Speeches

인간 구원의 방법

인간이 이처럼 타락했다는 결과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하늘이 사랑이고, 하늘이 우리 인류를 긍휼히 여긴다는 그런 마음이 있단다면 반드시 이 타락한 인간을 그냥 둬둘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인간을 다시 어떤 방법을 통해서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병이 나고 고장이 났으니 이것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입장에 서지 않으면 하늘은 사랑이 아니요, 하늘은 최고의 선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타락한 역사노정에 있어서 지금까지 종교라는 이런 테두리를 세워 가지고, 오늘날 수많은 인류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의 선의 목적세계, 하나님이 목표하신 최후의 이상세계를 향하여 수많은 인류의 배후에서 인간들이 아나 모르나 하늘은 끊임없는 역사적인 동반자가 되어 가지고 섭리해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부정할 도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역사가 자기 멋대로 움직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다면 기필코 하나님의 섭리와 어떤 일정한 보조를 맞추어 가지고 역사적인 발전을 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런 결론을 우리가 맺을 수 있다는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막연하다면 그러한 하나님으로서 인류를 구원할 도리가 없다는 거예요.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구체적인 하나님이요, 실질적인 하나님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실질적인 인간을 구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하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은 모르는 가운데 오랜 세월을 두고 인류를 인도해 온것입니다. 사람 뒤를 따라 나가면서 인간들이 악한 세상에서 지치게 될때 비로소, 그 세상을 버리고 돌아서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인간세상에서 낙오자가 된 그런 사람들을 취해 가지고 새로운 방향을 가르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 그 환경에서 전폭적으로 맞아들여지는 입장에 서지 못하고, 도리어 이 세상에서 이탈해 가지고 세상을 비관하고 세상을 박차고 인생의 참모습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새로운 무엇을 찾아 헤매는 그런 길에 나서게 될 때, 하늘은 이들을 불러 새로운 방향을 거쳐 가지고 역사적인 섭리를 해 나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천년 동안 지금까지 해 나왔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이거예요. 왜 하늘은 그렇게 해야 되느냐 이겁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면, 만일에 악한 사탄이 있다면 그 사탄을 일시에 추방해 버리고 한꺼번에 쓱싹해 버리면 될 텐데 어찌하여 그렇게 할 수 없느냐 이거예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 오늘날 우리가 태어나기를 어떻게 태어났느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악을 중심삼고, 혈통적으로 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악의 뿌리에 접붙여져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이걸 갑자기 따다가 옮긴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이와 같이 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하늘의 새로운 뿌리로부터, 새로운 줄기로부터 새로운 가지를 무성하게 해 놓고, 여기에 참다운 인간의 견본, 참다운 인간의 모형, 그 나무와 같은 모형을 만들어 놓고 그다음에 그것을 잘라 버리고 이 가지를 갖다가 접붙이는 역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타락한 세상과 하늘이 찾아서 오는 섭리의 역사의 배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라는 것은 이땅 위에서 종교의 길을 가기 위해 먼저 있던 사회제도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자리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종교는 없습니다. 부정에서 출발했다는 거예요. 긍정으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완전 부정으로 출발했다는 거예요. 불교는 산중수도를 하고 기독교도 역시 사회생활에서 이탈되는, 물론 사회제도 안에서 살지만 가정을 못 가지는 이런 독신생활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금욕생활을 하는 동시에 그다음에는 모든 혈기를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좋아할 수 있는 모든 요건을 전부 다 부정하는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이거예요. 그건 뿌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그냥 둬뒀다가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을 어느 한때에 하늘이 기른 새로운 뿌리로부터 새로운 가지, 새로운 잎이 무성한 나무를 만들어 놓고, 이것의 밑을 잘라 버리고 접붙이는 거예요. 접붙이면 어떻게 돼요? 그래서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참감람나무요, 너희는 돌감람나무라고 하셨습니다. 돌감람나무 열매는 까치밥밖에 못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역사의 기원이 어떻게 됐느냐? 하나님이 동기가 되고 하나님이 뿌리가 되어 가지고, 우리 인류세계가 그 직계를 거쳐오면서 그것이 줄기가 되고 30억 인류가 하나님이 심어 놓은 나무와 같이 되었더라면, 오늘날 종교니 무슨 구원이니 기도니 하는 것은 다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 자체 사는 것이 종교예요. 생활적인 종교라구요. 종교라는 명사가 필요 없다는 겁니다. 무슨 기도가 필요하냐 말이예요. 또, 구원이 뭐가필요해요? 구주가 우리에게 왜 필요해요? 구원이 필요 없는 완전한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이거예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원이 필요하고, 구주가 필요하고,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복을 주시옵소서' 하고 있습니다. 복은 무슨 복이예요? 세상에 뭐 무슨 밭뙈기나 주고 돈을 주는 것이 복이예요? 인생의 본연의 자기 가치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제일 가치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뿌리가 그릇됐으니 뿌리를 다시 한 번 뽑아서 나를 개조해서 딴 뿌리로 만들어 주든가, 그렇지 않으면 잘라 버리고 접을 붙여서 나를 새로운 나무로 만들어 주든가 둘 중의 하나를 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여러분 그거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오늘날 타락한 세상에 있어서…. 실례지만 오늘 처음 온 사람 한번 손들어 보세요. 선생님을 처음 본 사람 손들어 보시라구요. 내려요. 그러니까 이 얘기를 안 할 수 없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