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집: 나의 뜻과 신념 1969년 02월 0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19 Search Speeches

나를 위해 고생하고 희생당한 가족"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그 누구보다도 정성을 많이 들였습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해서 내가 자식노릇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어느땐가 내가 이북에 가게 될 때에는 이미 만나뵙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해서 기도 한 번 안 해봤습니다.

내가 요구하면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보내 줄 수 있는 그러한 형님인데도 불구하고 그 형님에 대해서 내가 통일교회 누구라는 이야기나 무슨 사상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에게도 얘기 못 해줬습니다. 단 한 가지 그분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 그것은 알았습니다. 너무도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과 불의에 대해서는 참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자라면서도, 동네에서 누군가가 자기가 잘산다고 해서 못사는 사람들을 천대하는 것을 보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못 참았습니다. 그러니 동네사람들도 나를 무서워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먹을 것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엿을 사다 놓든지 떡을 하시든지 하셨기 때문에 언제나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고 있어서 내가 이것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갖다 주곤 했었습니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신 부모님께도, 형에게도 선생님은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 동생들 중에는 나 때문에 희생된 동생도 있습니다. 내가 이 길을 가기 때문에 죽은 동생도 있습니다. 그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왜정 때 감옥에 들어가 고문 받고 있을때 누이동생이 죽었습니다. 그건 순전히 선생님 때문에, 탕감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하늘의 역사는 반드시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 가정에는 풍파가 많았습니다. 한 7년 동안 재앙과 풍파가 많았어요. 열 세식구중에서 다섯 식구가 죽어 여덟 식구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개가 죽지, 소가 죽지, 형님이 미치지, 누나가 미치지……. 사탄의 활동 때문에 그런 역사적인 탕감을 치렀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섭리적으로 볼 때에 그럴 수밖에 없는 배후의 사연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선생님이 어떠한 마음을 품고 다니는지 몰랐습니다. 형님에게도 얘기 안 하고, 부모에게도 안 했습니다.

그렇게 해방될 때까지 참고 나왔습니다. 해방되고 나서 선생님은 한국에서 `한다' 하는 신령한 사람은 다 찾아가서 만나 봤습니다. 그들을 만나서 영계의 사정을 물어보면 아무래도 그 사람들의 대답이 미흡하더라는 것입니다. 미흡한 사람은 완전한 시대에 남아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앞으로 나가다가 전부 중도에서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을 어떻게 타파해 나가고, 새로운 기준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을 놓고 학생 때부터 생각해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