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집: 승축일 1974년 07월 01일, 미국 벨베디아수련소 Page #267 Search Speeches

죄지은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사탄 자체" 용서 못 한다

사탄은 어떠한 존재냐? 어떠한 원수냐?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간 사랑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을 끊어 놓은 것입니다. 생명의 원수가 이거예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이상을 파탄시킨 원수입니다.

기독교의 사상이라든가, 지금까지의 사상은 용서를 위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왜 하나님이 용서를 못 하느냐 이겁니다. 예수님은 죄지은 자를 용서하기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하라고 했는데, 왜 사탄은 한번 죄지은 것을 용서를 못 하느냐? 이게 문제라구요.

여러분 인간을 대해 가지고 죄지은 것은 하나님이 사탄을 분별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원섭리를 하기 때문에, 사탄을 분별하기 위한 목적이 있으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을 떼어 버리기 위해서 구원섭리를 하기에, 죄지은 사탄을 분별하고 떼어 버리기 위해서는 몇번이라도 용서해 주고 떼어 버리게끔 할 수 있지만 사탄 자체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용서할 수 없는 거예요. 그건 왜? 사랑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사탄을 용서할 수 없지만, 앞으로 아담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어서 아담을 통해서 이루었던 이상의 이상을 누릴 수 있는 때가 되어 가지고, 그 세계 사람이라든가 아들딸들이 사탄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길이 있어서, 용서해 주길 바란다면 그때는 모른다는 거예요. 아담을 통해 가지고 사탄이 들어왔기 때문에 아담을 통해서 사탄을 굴복시키고,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비로소 사탄을 용서할 수 있는 길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를 가져왔는데, 우리 인간 자신은 누구의 몸이 되었느냐 하면 사탄의 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몸뚱이는 하나님의 핏줄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탄의 핏줄을 타고 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이 아닙니다. 핏줄을 통해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종교는 어느 종교나 피를 흘리는, 더우기나 미개한 종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든가 모든 동물을 제물로 바치든가 해서 피를 흘리는 놀음을 해온 것입니다.

전부 다 피를 맑게 하기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사탄의 피를 제거하는 방법은 그냥 그대로 좋고 기쁜 자리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고통을 주어 가지고 전부 다 빼는 운동을 해야 됩니다. 전부 맑게 하는 운동을 해야 됩니다. 이것을 다시 복귀하기 위한 역사가 지금까지의 구원섭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기에는 우리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라 이겁니다. 사람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사탄의 새끼예요. 원수의 새끼예요. 원수의 아들딸이라는 거예요. 이런 결과가 타락입니다. 이런 사람을 다시 수선해 가지고 타락하지 않았던 아담 해와와 같이 하나님이 생각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럴 수 있어요? 여러분이 생각해 봐요. 하나님이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 이상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게 얼마나 고통이겠느냐?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딸을 데려다가 양자를 삼더라도 자기의 뼛골에서 나온 아들딸같이 사랑할 수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의 심정인데도 불구하고, 원수의 피를 받고 원수의 모양을 닮은 원수의 자식들을 어떻게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뜻대로 된, 본래의 아들딸과 같이, 그 이상의 가치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고통스러운 일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본연의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 하나님 자신이 이것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가지고 오늘날 복귀섭리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겁니다. 하나님도 사탄의 아들딸을 데려다가 아들딸의 입장에 세워 놓고 못살게도 하고 싶었고, 고생하게 하고 싶었고, 천대하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것 같아요, 안 그럴 것 같아요? 그러므로 '아무리 고통을 주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 해야 됩니다. 비참하게 하면 할수록…. 그 자체에 있어서 동정의 마음을 찾을 수 있는 길은 비참하게 대해 주는 하나의 길밖에 없을 것이다 하는 것은 심정세계에 타당한 말입니다.

죽을 자리에 내세우더라도 반항하지 않을 수 있는 모습을 볼 적에, 그래도 본연의 사랑의 마음을 회생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시대에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죽는 자리에 내주고, 가정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죽는 자리에 내주는 놀음을 해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는 심정세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