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집: 신앙자의 태도 1959년 03월 2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73 Search Speeches

예수님이 지상-서 느낀 것과 각오

그뿐만 아니라 그 외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걸어온 걸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이후 4천년 만에, 타락한 아담의 모든 실수를 그 몸에 담당하고, 하늘의 슬픔과 만민의 슬픔과 온 만상의 슬픔을 그 몸에 지니고, 하늘의 탄식과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모든 흑암의 조건들을 홀로 담당하고 이것을 타파시키기 위하여 오셨던 제2의 인류 조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회상해 봅시다.

예수님은 땅 위에 어떤 분으로 오셨던고. 그는 4천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범죄로 인한 두려움을 느끼지 아니하고, 죄로 말미암은 슬픔을 감촉하지 아니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선의 감촉과 선의 심정에 사무쳐서 지으셨던 본연의 아담 해와를 그 마음으로 동경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인류의 참된 선의 조상이 되어야 할 아담 해와의 모습을 대신 복귀하기 위한 역사적인 인연과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대신하여 왔다고 하는 신념이 사회의 어떠한 환경보다도, 살아가는 자기의 어떤 심적 동향(動向)보다도 컸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외로움이 있다고 하면, 그 외로움은 하늘과 인연되어 있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외로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외로움을 헤아리게 될 때에 자기의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어떤 소망이나 이념에 사무칠 적마다 인류 앞에 그 소망과 이념을 소개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을 이루어 드려야 하고 선조들이 타락으로 저끄린 모든 죄상을 탕감해야 할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진 자기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타락한 아담을 원망하기에 앞서, 타락한 후손을 원망하기에 앞서, 나아가서는 천사장을 원망하기에 앞서 그 원망에 사무치는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한걸음 더 나아가 창세 이후 4천년의 서러운 복귀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아버지요 아들이라 할 수 있는 ,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자기 자체인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요, 자기 자신은 하늘 땅을 대신한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장한 자리에서 느껴진 그 인연의 충격으로 하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성상이, 땅을 바라보게 될 때에 땅의 성상이, 만민을 바라볼 때 만민의 성상이 자기와 영원한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그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무엇이었던가. 기쁜 인연이 아니라 슬픈 인연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기쁨의 인연을 갖추고 영원한 이념의 동산을 건설하여 하늘과 부자의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의 일체의 조건이 아버지의 기쁨의 조건을 자극시켜 드리고 그 기쁨의 심정을 노래해야 했으나, 기쁨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슬픔의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면 느낄수록 슬퍼하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 있던 예수님은 4천년 동안 자기 선조들이 맺은 인연이 기쁨의 인연이 아니고 슬픔의 인연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슬픈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슬플 적마다 각오하였고, 어려울 적마다 각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륜의 기쁨의 제단을 갖추어 서지 못하는 민족과 유대교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슬픔은 컸습니다. 교단을 알고 보니 안 만큼 슬프고, 민족을 알고 보니 민족을 안 만큼 슬프고, 자기의 종족, 자기의 사정을 안 만큼 슬펐습니다. 이렇게 알면 알수록 그 앎이 기쁨의 조건이 되지 못하고 슬픔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에 연한 역사를 책임졌기 때문에 그 심정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시고 애통함을 가지시고 가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의 마음은 무한히 영광된 선한 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였으나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은 자탄할 수밖에 없는 무한히 슬픈 세계였습니다. 이렇게 두 교차점에 선 예수님의 사정을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