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집: 여지없이 투신하는 여러분이 되라 1969년 10월 14일, 한국 종묘 Page #8 Search Speeches

참의 기원을 마련하려면

그러면 이러한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참의 기원은 무엇이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역사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성인이나 현철들이 싸워 나왔지만, 완전히 해결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짓기 위해서 공자나 예수 같은 양반들, 혹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성인이나 현철들이 무척이나 애썼지만 해결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짓는 데 있어서 좋은 면만 바라보고 해결을 지으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를 했던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기쁜 날을 중심삼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슬픈 날을 중심삼고 출발했기 때문에, 그 기원의 슬픔 이상의 자리까지 들어가지 않고서는 슬픈 사실을 해결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슬픔의 기원의 자리를 찾아가지 않고 이것을 떠나서 다른 데서 해결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모든 일들이 해결을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결짓지 못한 난문제들이 널려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인류의 시조가 타락으로 인하여 슬픈 자리에 떨어졌다면, 우리는 그 슬픈 자리 이상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조상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셨다면, 그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한 날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슬픔 이상의 자리까지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위로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슬픔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참다운 성현이라면, 인류가 바라는 이상세계의 표본이 될 수 있는 참다운 인물이라 한다면 이 슬픔을 밟고 올라가 이 슬픔 이상의 자리에서 기쁨을 찾아 세워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악의 권내에서는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아무리 해결의 방안을 강구한다 하더라도, 역사의 기원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승리적 기쁨은 우리 인류역사상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또 나 자신이 이 길을 개척하게 된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으로 지으셨다면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달은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부모라면 그 부모의 입장에서 얼마나 인류를 사랑하셨는가? 그 사랑의 기준이 무엇이냐? 이런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이 슬퍼하셨다면 어느 정도나 슬퍼하셨느냐 이거예요. 이것도 문제라는 거예요. 오늘날의 종교인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선 손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슬퍼하신 것이 물론이겠지만, 인류의 조상 자체도 얼마나 슬퍼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슬퍼하셨고, 인류의 조상이 슬퍼했습니다. 위로는 하늘이, 아래로는 땅이 슬픔의 기원을 갖고 역사가 출발되었는데 그러한 인류역사의 슬픔의 기원을 어떻게 체휼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슬픈 역사의 기원을 넘어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나이가 이 땅에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 나왔지만 역사과정에서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나이가 나와야 합니다. 인류 조상이 타락하여 느낀 그 이상의 슬픔을 느꼈던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정 앞에 설 수 있고, 그 슬픈 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과 아들과 딸의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못했을 때를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