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집: 하나님의 생각과 나 1990년 01월 07일, 한국 본부교회 Page #72 Search Speeches

나라를 구하기 위한 마음을 '고 가" 사람은 하늘이 보호해

사탄세계가 몽땅 통일교회 문총재의 꽁무니에 달리고, 통일교회 반대하는 사람들의 2세들, 대한민국의 젊은 사람들이 통일교회에 다 들어오는 거예요. 이거 젊은 놈들이 들어왔는데…. 협회장 지금 몇 살이야? 늙은이 다 됐어. 젊은 놈들 어떻게 되느냐? 내가 축복이라는 것을 해줬기 때문에 2세들은 전부 다 갈 데 없이 통일교회에 남아지게 돼 있지요? 축복 안 해줘서 젊은이들이 하나도 없으면 통일교회 망하는 것 아니예요? 그렇지요? 축복을 해줬으니 내 울타리를 떠날 수 없어요. 그래, 안 그래?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아들딸 있어요? 아들딸 있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내가 결혼시켜 주지 않았어? 정초가 됐는데 저 뭣인가, 전부 다 소갈비 한 짝씩 가져와야 될 거 아니야? 그래야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들한테 하나씩 나눠 먹이지요. 가져왔어요, 안 가져왔어요? 돼지 뒷다리라도 하나 사 와야지. 사 왔어, 안 사 왔어? 세상에서는 중매 한번 잘 서게 되면 일생 동안 얻어먹고 사는데, 이건 결혼을 얼마를 시켜 줬는데도 뭐 하나 생기는 게 없다구요. 배가 고파 죽겠다구, 이 쌍것들아. (웃음)

자, 이제는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야 할 때가 온다구요, 내가 여러분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때가 달라졌어요. 알겠어요? 다음부터는 축복받은 가정들 평안북도 패, 평안남도 패, 어디 패 어디 패 쭉 창고를 만들어 놓을 거예요. 몇 도인가? 열두 도면 열두 도 도별로 창고를 만들어 놓고 소다리, 소갈비, 돼지 앞 뒷다리, 이래 가지고 쭉 창고에 넣으라고 하는 거예요. 안 갖다 놓으면 큰일나는 거예요.

그다음에 12월 30일쯤 되게 되면 `자, 신년이 다가오는데 국밥 끓이지 못하는 사람들 전부 다 오너라. 너도 먹고 물러가라' 이러면서 전부 다…. 내가 이제 그걸 조사하려고 그래요. 진짜 굶는 사람들이 오느냐, 부정축재한 녀석들이 오느냐? 부정축재하는 녀석은 껍데기를 벗길 거예요. 내가 그러려고 그래요.

이만한 창고 열두 개를 만들어 놓더라도 내가 짝지어 준 패들이 소다리 하나씩만 가져오면 꽉차겠나요, 안 차겠나요? 차지요? 「예」 다음부터는 소다리 하나씩 전부 준비해요. 내가 먹지 않아요. 나는 필요 없어요. 고기 생각만 해도 메스꺼워요. 돼지고기 생각만 해도, 아이고 나 기름져 가지고 그거 빼기 곤란해요. 그거 불쌍한 한국 사람들 주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유학 오는 사람들 많을 거예요. 거 불쌍하다구요. 그래, 유학 오는 사람들 한국 말 다 배웠으니 잘 먹이고 교육해 가지고…. 한 40일만 교육하게 된다면 그들이 20년 교육받은 것 그냥 그대로 포켓에 집어넣을 텐데, 그거 왜 안 해? 그들을 부려먹고 다 이러기 위해서는, 졸업할 때까지 한 4년쯤 서너 번 잘 차려서 잔치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나라에 가서 그거 잊어버리겠나요, 기억하겠나요? 「기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다리가 필요하고 소갈비가 필요한 거예요.

그건 누가 했느냐고 했을 때, 문총재는 그렇게 해줄 줄 아는 분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세계가. 그러나 통일교회 교인들은 그러리라 생각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 요렇게 해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도 선생님과 같은 자리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런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러느니라. 「아멘」 아멘이야, 노멘이야? 「아멘!」 `아멘' 하는 사람 쌍수를 들어 봐. 내리라구요. 너희들은 소갈비야! (웃음) 저 김봉태도 할 거야? 「예」 없으면 2식 해요, 1년 열두 달 동안. 선생님은 2식하면서 3년 동안 살았어요. 밥을 내놓고 3년 동안 살았어요. 금식을 밥 먹듯이 했어요. 30세까지 점심을 안 먹었어요. 제일 배고플 때 집 떠나 가지고 줄곧 2식주의였어요, 2식주의.

제일 힘든 것이 뭣이었느냐 하면, 동창생이랑 같은 방에 있는데 이 친구가 점심을 갖다 놓고 자꾸 먹자고 하는 거였어요. 그것을 이기던 것이 지금 생각난다구요. `내가 할 일이 있어. 내가 할 일이 있어. 숙제가 많아. 이걸 청산하려면…' 해 가지고 안 먹고 그랬다구요.

30대까지 배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우리 집이 가난한 집이 아니었어요. 돈을 보내 주면 미리 전부 다 써 버리는 거예요. 불쌍한 사람들한테 나눠 주고 말이예요. 그렇게 살다 보니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건달꾼이라도 그런 건달꾼이 없는 거예요. 신용 없는 건달꾼이예요, 내가. 돈을 보내 주는 대로 일주일도 못 가서 다 없어져요. 왜? 불쌍한 사람들한테 나눠 주는 거예요.

내가 그때 노량진에 좀 있었는데, 거기에서 학교까지 5전이면 전차를 타는데 전차를 타지 않고 그 5전을 넣어 가지고 걸어오다가 내리는 곳쯤에서 적선하고, 갈 때는 또 노량진에서 적선하고 그러고 다녔어요. 그러고 다니면서 `내가 이 나라 찾아들어와 가지고 큰소리할 때까지 잘 자라라. 죽지 말고 나와 더불어 크자' 하면서 나무를 치고 다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그 플라타나스가 다 없어졌더구만.

한강을 건너가다 보면 나까시마, 중도(中島)라는 게 있다구요. 거기서 한강 물을 보고 탄식하던 일이 생생해요. `너는 천년만년 흐르지만 얼마나 붉은 마음을 가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을 품기 위해서 흐르느냐? 생명줄이 될 수 있는 것이 물인데 이 비옥한 삼천리강산을 단장할 수 있는 샘, 어머니 젖과 같은 이런 한강수가 돼야 할 텐데…. 너는 못 하더라도 나는 할 거야' 하던 것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때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다구요. 거기 걸어다니면서 그랬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그런 걸 봐 가지고 나를 불러다가 훈시까지 했다구요. `너는 학교 패스권이 있고 그러니 싸게 사 가지고 다니면 될 텐데 왜 걸어다니느냐?' 하고 말이예요. 그렇지만 `아니예요. 다 사나이가 갈 길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했다구요. 그랬기 때문에 내가 일본에 갈 때 교장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서 갔다 온 사람이예요.

내가 일본에 갈 때 철도역에서―그때는 히까리호가 있었다구요.―서울역에서 그 열차를 타면서 `내가 갔다 올 때는…. 패자의 졸렬한 사나이로 흘러갈 것이 아니야. 나라를 구도하기 위한 붉은 마음을 품고 가는 사나이의 길은 하늘이 보호한다. 내가 돌아올 때는 너는 희망에 벅차 있을 것이다'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2차대전 때에 한국에 폭격 한 번 안 했다구요. 그때 눈물로 기도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전부 다 이 민족이 잘못했어요. 그래서 이 나라가 동강이 나고 그런 걸 수습하기 위해서 내 일신이 제물의 놀음을 해 가지고…. 나 아니면 이제 대한민국의 살길이 없는 거예요. 암만 큰소리해 보라구요, 그런가 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