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집: 자녀의 날을 맞는 우리의 각오 1970년 10월 3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92 Search Speeches

참다운 아담 한 사람을 찾아온 인류-사

본래 하나님의 날이니, 부모의 날이니, 자녀의 날이니, 만물의 날이니 하는 날들은 우리가 일년을 경과하면서 지킬 것이 아니라 한 날에 지켜야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류가 타락이라는 한스러운 조건에 걸렸기 때문에 한 날에 지키지 못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런 날들을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신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완성과 더불어 부모의 날이 책정되는 것이요, 자녀의 날이 책정되는 것이요, 만물의 날이 책정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소원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즉 창조이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완성된 만물과 완성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일체가 되면, 하나님과 인간이 뗄래야 뗄 수 없고 인간과 만물이 뗄래야 뗄 수 없는 삼각의 관계가 형성되어 일체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가게 되었고, 참다운 부모와 참다운 자녀와 참다운 만물을 기념할 수 있는 날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날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서글픈 복귀의 노정, 서러운 재창조의 노정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재창조되는 데는 만물을 중심삼고 인간이 재창조되어야 하고, 인간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창조이상과 하나님의 사랑이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복귀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만물을 찾기 위한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을 살펴보면, 만물은 이미 사탄에게 침범당한 입장이었기에 사탄을 분립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이라는 조건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탄을 분립하는 역사를 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인간을 찾고자 하였는 데, 우리 인간도 타락된 혈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분립 역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분립된 승리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부부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사탄의 사랑의 대결 과정을 거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남아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늘이 뜻하신 소원의 한날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과정이 얼마나 지루했는 가를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날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이 재생될 수 있는 승리의 기반을 닦기 위하여 이때까지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 나온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만물도 탄식하였거니와, 그러한 인간으로 복귀되기 위해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피와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 나왔습니다. 이러한 희생의 대가를 모으고 또 모아서 선한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참다운 아담 한 사람을 찾아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담형의 인물을 세워 가지고 역사하고, 시대를 거쳐 그 위업을 계승하면서 완성된 아담의 모습을 찾기 위해 수고해 온 역사가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입니다. 그 아담을 찾은 후에는 해와를 찾아야 합니다. 해와까지 찾아야 비로소 완전한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창조 이상을 완결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 이상을 완결지을 수 있는 개인들이 참다운 부부의 인연을 갖추어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됨으로 말미암아 선의 주관권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담을 재창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되고, 그 다음에는 아담을 모방해 가지고 해와를 재창조하는 과정을 거쳐서 '지극히 선한지라'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지라'하는 기준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되지 않고는 완결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원리의 견해인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구분해서 살펴보면 구약시대는 만물을 분별시키는 때요, 신약시대는 사람을 분별시키는 때요, 성약시대는 승리한 아담 해와를 중심삼아 아담 해와가 잃어버렸던 사랑의 가정을 분별시키는 때입니다. 이 시대는 완성시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부모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류의 부모를 중심삼고 분별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모가 이 땅에 와서 분별의 과정을 가는 데는 수난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원리적인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