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집: 하나의 세계를 이루자 1964년 03월 23일, 한국 대구교회 Page #50 Search Speeches

참의 주인공은 하나님

여러분 그런 것을 생각해 봤어요? 어떤 사람을 보면 '나는 부모가 없어서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았으니 슬픈 존재다' 합니다. 왜 슬퍼요? 왜 슬프냐 이거예요. 그것은 공적인 이념세계와 참의 인연을 맺어야 할 자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된 우주세계에서 참의 인연을 맺어야 자기 가치가 참된 우주세계에서 존재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요, 그것이 천리의 원칙인데 그렇게 살지 못하니 슬프다는 거예요. 자기는 천리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여 살아야 할 인생인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건들이 전부 다 제거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천운이 움직이는 참된 표본에 부합되는 요소를 결하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우주 대존재권 내에 존재하기에 결함이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연고로 슬픔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참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역사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투쟁과정을 거쳐 가지고 발전해 나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문제를 걸어 놓고 혁명을 일으킨 왕조가 어디 있었으며, 역사상에 영웅열사가 있었느냐? '나는 당신의 자식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부정의 팻말을 박고 낙인을 찍어도 그것이 인정될 수 있겠느냐 이거예요. 아버지가 공인하고 자식도 '그렇다' 하는 여기에는 침범을 받지 않는 것이요, 침범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혁명의 운세나 혁명의 사조와는 무관한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참된 것이요, 공동 소유의 물건이예요.

그러면 공동 소유라 했으니 인간들만 소유할 수 있는 공동권 내의 소유물이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도 역시 필요로 하는 것이라야 된다 이거예요. (녹음이 잠시 끊김)

그렇기 때문에 참의 주인공이 누구냐? 참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예요. 참 자체의 주인공이 누구여야 되겠느냐? 그보다 더 높은 참의 존재가 아니고는 주인공이 되지 못해요.

두 사람이 있다고 할 때, 한 사람은 종이고 한 사람은 주인이라고 합시다. 주인과 종은 무엇이 다르냐? 그건 과거도 다르고 현재도 다르다는 거예요. 출발점이 달라요. 그리고 지니고 있는 속성이 달라요. 세상에서도 그렇지요?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주종관계가 벌어진다 이거예요.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더 높을 수 있는, 즉 가치적인 모든, 외적이라든가 내적이라든가,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할 수 있는 내정에 있어서 그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삼고 주종관계를 세울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도 역시 참의 주인공이고, 오늘날 인생이 바라고 있는 그 참이 지배받을 수 있는 주인공이 있다 할진대는 그 참의 주인공의 참보다 더 높은 참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그 참의 주인공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여야 할 것이냐? 하나님이라든가, 갓(God)이라든가, 가미사마(かみさま)라든가 하는 명사를 붙였는데, 그 명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이 제일 찾고 있는 최고의 참, 만민이 고대하는 최고의 참이 무엇이예요? 떡이예요? 돈 보따리예요? 아니예요. 권세예요? 아니예요. 지식이예요? 아니예요. 전부 다 아니예요. 이 땅 위의 인간들이 흔히 '지식이면 된다. 권세면 된다. 돈이면 된다'라고 하지요? 이것이 인간이 바라는 3대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돈은 돈으로서 끝나는 것이요, 지식은 지식으로서 끝나는 것이요, 권세는 권세로서 끝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영원한 공동적인 참의 실체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계적인 권내의 일방향성을 갖고 있는 그 한계 내에서만 인정이 되지, 사방성을 넘고 입체성을 넘어 가지고는 적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의 양심세계를 관찰해 볼 때, 돈 가지고는 참다운 사람을 찾을 수도 없으며, 참다운 사람을 만들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권세 가지고도 그렇다구요. 지식 가지고도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