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집: 하늘과 땅이 기필코 찾아가야 할 곳 1965년 10월 1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13 Search Speeches

예수님의 한

하나님께서는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뜻을 위해 나아갈 때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과 같이 죽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되고, 함과 같이 노아의 전체적인 뜻을 전복시키는 자리에 서서도 안 되며, 아브라함과 같이 3제물을 실수하던 것과 같은 자리에 서면 안 될 것입니다. 또 모세가 반석을 잘못 쳐서 실수하던 자리,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약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던 그런 환경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을 중심삼고 나가야 하느냐? 예수님과 같은 그 자리보다도 더 앞선 확고한 중심을 찾아야 합니다. 이때가 끝날입니다. (중략)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세계를 향해 개척자의 사명을 하려고 했던 것을 내가 대신 하겠다고 하면서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동으로 서로 세계 만민을 구하기 위하여 가보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습니다. 이 땅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책임지고 그 길을 닦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실 길을 미리 알아서 그 길을 닦고 ‘이 길로 오셔서 쉬소서’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을 품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이 요구하고 땅이 요구하는 최종 기점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갈래야 갈 수 없고 어떻게 할래야 할 수 없는 기점, 즉 하나님의 갈 길과 하나님의 할 일을 내가 책임지고 하나님을 안식시킬 수 있는 하나의 터전입니다. 그것을 이 땅 위에 닦아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해 나오신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만민을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시며 사망의 고빗길에서도 그들을 구해 주려고 하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항상 배척을 받으시면서도 그런 환경을 찾으시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수고하시면서 개척자의 사명을 해 나오신 하나님을 예수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산정을 향하여 가실 때에, 누차에 걸쳐 그 무거움 때문에 지쳐 쓰러지면서도 ‘내가 쓰러지는 것이 분하오나 하나님이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채 열 두 차례나 쓰러지면서 그때마다, ‘내 피를 다 바쳐 아버지를 위하지 못하고 효성을 다하지 못하였기에 이 길을 가는 것이다’ 하는 마음을 품고 갔기에 사탄이 하나님 앞에 참소의 조건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생명을 바친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리 사탄이라 할지라도 참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짐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두고 떠나갈래야 떠나갈 수 없고, 자식이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것이 천륜입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이 땅에 이루지 못한 그 뜻을 책임지고 이룩하기 위해 오시는 분이 바로 재림 예수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도리를 가르쳐 주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책임질 수 있는 도리와 자녀의 도리를 가르쳐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는 모든 활동과 조건을 제거시킬 수 있는, 즉 모든 환경을 수습할 수 있는 승리적인 존재가 곧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중심존재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의 역군들은 선생님을 만난 것이 일면 한이 될 때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남모르는 역경의 길을 지금까지 걸어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기뻐서 따라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환경에 몰려 마지못해 따라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천태만상의 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처해 있는 입장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느냐, 천지가 공히 요구하는 그 목적 앞에 방향을 일치시키고, 하나님 앞에 보답함과 동시에 위로의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직도 거리가 먼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중략)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오,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니 천지 만물이 경배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자기의 아들딸이 사지경각에서 죽어가고 있어 장송곡을 불러야 할 입장이며 천지의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는데, 하나님만, ‘오오, 너희들 잘 노는 구나’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라면 인간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한 세계에서 부모의 심정을 그 자녀가 체휼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지를 창조한 본연의 아버지께서 자식을 대하시는 깊은 심정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을 그들이 알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백번 천번 죽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지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욕망과 내 소망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움직여야 할 것이며, 당신이 한 날을 편안하게 계실 때에 나는 한 시간을, 아버지께서 천년을 안식할 때에 나에게는 일년의 평화가 있기를 바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억천만세토록 영광을 노래할 때, 나는 그로 말미암아 한 생의 기쁨을 누리고 즐기겠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을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단을 위주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은 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통일교회라는 간판을 붙이고 있지만, 이 간판을 언제나 떼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회 사람들이라고 주목을 받고 있겠지만, 그 주목이 삼천리 반도에서 언제 사라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 식구들은 하나님의 맺힌 한을 풀고자 이를 악물고 노력하고 있고, 하나님의 고난 길을 대신하여 나서겠다고 충효의 심정으로 뛰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다가 쓰러지는 것을 최고의 기준으로 결의하고 나가고 있는 무리가 통일교회 식구들입니다. 이렇게 가는 길이 복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