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집: 축복의 땅을 지니기 위하여 1962년 10월 2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73 Search Speeches

기어이 가야 할 길

그러면 앞으로 남아지는 민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습관적인 생활의 이념이나 상습적인 구약시대의 이념을 가지고 그대로 생활해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혁신을 해야 합니다. 사탄세계 안에서 개인, 가정, 만족, 국가적으로 하나님의 이념을 중심삼고 투쟁해야 합니다. 원수의 나라에 들어가서 투쟁해야 합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같은 곳에서도 마음으로는 `이놈들…' 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먹고 호화로와도 그 세계 사람이 아니라 하늘편 사람이어야 합니다.

투쟁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마음과 몸의 투쟁이 벌어집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모세도 호화로운 자리보다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민족적인 지도자로 부를 수 있었습니다.

모세를 세워 그를 최고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셨고, 그 다음엔 최하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탄세계의 영광을 무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돌들이 떡덩이 되게 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나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다 주겠다'고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세계의 최고의 자리에서도 불쌍한 자리에 있는 하늘편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가 애급인을 쳐죽인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틀림없는 죄지만 심정적으로는 참소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민족적인 지도자로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과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의 영광도 죽음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시대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투쟁에 있어서도 개인의 영광이나 가정의 화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적인 생활기준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투쟁에서 30평생 그런 일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따랐다면 개인, 가정, 민족,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적인 기준도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가정, 개인, 민족, 국가, 그리고 세계적인 투쟁에 가담할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이 쓰러져도, 국가 버려도, 세계가 버려도 밟고 넘어가야 합니다. 영광의 자리, 사랑하는 아내라도 뜻과 배치되면 미련 없이 버리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복귀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죽더라도 이 뜻을 위해 무언가 남겨 놓고 가야 합니다. 내 머리카락 하나라도 성전 가까운 곳에 떨어뜨리고자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습니까? 이 뜻은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바꾸면 원수가 됩니다. 이렇게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여러분은 개인의 투쟁, 가정의 투쟁, 민족의 투쟁, 국가의 투쟁, 세계의 투쟁에 동참해야 합니다. 어려워서 못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가십시오. 그런 사람은 전통을 더럽힙니다.

안 가면 망합니다. 내몰아야 합니다. 불구덩이라도 같이 가자고 하면 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모세가 가는 데까지 가야 했습니다. 축복도 자기들 잘살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뜻의 기반을 넓히기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실체적인 책임을 끝날의 성도인 우리들이 다 해야겠습니다.

전체가 한꺼번에 못 넘어가면 한 사람씩 다리를 놓아서라도 넘어가야 합니다. 광야시대에 처한 사람은 자기 인격의 존중이나 체면을 논할 수 없습니다. 누더기 옷을 입어도 상관없다고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싫든 좋든 모세의 뒤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것만은 결정적인 사실입니다. 이의가 없습니다. 이의가 있으면 죽어야 합니다. 상거지가 되더라도 가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한국이 축복받았다고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됩니까? 책임을 못하면 그 축복은 외국으로 갑니다.

복귀의 길은 선생님이 가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옆에서 사람이 쓰러져도 버리고 가야 할 것입니다. 단단히 각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신념을 가져야 세상적인 어떤 지위나 영광을 줘도 차 버릴 수 있는 기준이 서는 것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이념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모세나 예수님도 남다른 사상을 가졌기에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늘 주권의 세계를 찾는데 사탄세계에 시체를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공적인 기준에는 사적인 기준이 통하지 않습니다. 자고 싶은 것 다 자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광야시대를 기준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집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시골에 가서 방 한 칸 얻으면 버젓이 간판을 달고 예배라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렸고, 똥바가지도 뒤집어썼습니다. 민족적인 책임을 못했으니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불을 덮고 자는 것도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도 들판에 나가서 돌을 베고 자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러분은 천정에 이끌릴 것이냐? 인정에 이끌릴 것이냐? 공분의 심정을 품어야 합니다. 선생님도 마음 한편으로는 칼을 품고 나가고 있습니다. 껄렁껄렁해서는 안 됩니다. 축복받은 사람도 내몰 것입니다. 안 가는 자는 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