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집: 다들 어디로 갈 것이냐 1987년 07월 14일, 미국 알래스카 코디악 Page #163 Search Speeches

참의 뿌리

그러면 참이라는 것은 도대체 누구를 중심삼고 하는 말이냐 이거예요. 보편타당한 진리의 내용이 참인데, 그 보편타당한 것이 한국적만 이어야 되느냐, 세계적이어야 되느냐 이거예요. 또, 뿐만 아니라 시대적이어야 되느냐, 역사적이어야 되느냐? 이렇게 물어 보게 되면, 학자라면 다 알 것입니다. 한국적이 아니고 세계적이요, 현실적이 아니라 역사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훌륭한 교수님들을 모셔다 놓고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이냐? 여러분들, 다 안 죽을 자신이 있어요? 안 죽을 자신 있습니까? 죽습니다. 틀림없이 죽어요. '내 손은 참의 손이다. 역사가 찾아오던 참의 손에 화합할 수 있는 바른손이고 왼손이다. 내 발도 그러한 바른발이고 왼발이다. 내 몸도 그렇다. 내 사지백체가 그렇다 내 마음도 그렇다. 살아온 내 일생이 그렇구만' 이럴 자신이 있느냐? 이거 심각합니다.

참이라는 것은 뿌리를 어디에 두느냐 이거예요. 이게 문제입니다. 혼란된 미국의 청소년들의 문제, 가정파탄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참의 정의와 그 기준이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참이 뭐냐? 어디에 뿌리를 두느냐 이거예요?

한 가지 이야기할 것은 참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참은 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요걸 알아야 돼요. 내 것이기 전에 나라의 것이고, 내 것이기 전에 가정의 것이고, 내 것이기 전에 사회의 것입니다. 참은 그런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것이기 전에 세계의 것이어야 되고, 세계의 것이기 전에 하나님이 있으면 하나님의 것이어야 됩니다. 이거 심각합니다.

참되게 살겠다고 하면, 누굴 위해 사느냐? 그 말은 뭐냐? 간단하지 않아요? 참되게 사는 것은 가정을 위해 살고, 나라를 위해 살고, 세계를 위해 살고, 하나님이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나는 어떻게 되느냐? 그 가운데에 들어가 사는 거예요, 그 가운데 일원으로서. 열 사람이 한 가정에서 살면 그 가정의 일원으로서 참의 10분의 1이지, 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참의 자리가 아닙니다. 이걸 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다 대학교에 종사하고 계시지요? 교수면 교수 자체로서 자기가 참이라고 하기 전에 대학교에 참된 기준을 세워 놓았느냐? 그게 안 돼 있다구요. 그건 가짜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은 대한민국을 참의 민국으로서, 내 실제는 갖추지 못했어도 마음으로 그렇고 사상적으로 그렇고, 이론적으로 체제를 갖추어 놓고 '대한민국은 이래야 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참의 기준 가운데 있는 대한민국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참은 그러한 뿌리를 갖고, 그런 배경을 통하여 나에게 연관성을 가지고 현실의 생활기반과 통하려고 합니다.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예요? 열 사람의 친구가 있으면 열 사람의 친구를 부려 먹겠다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예요? 열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건 뭐냐? 열 사람 전체에 평등의 가치를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나와 같이 일대일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나는 10대 1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내가 좋기 전에 10대 9가 좋을 수 있는 것이 참이 원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 논법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가정의 일원은 가정에 복종해야 됩니다. 참은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가정의 중심이 누구냐? 역사적 전통을 이어 나오는 거기에는, 할아버지가 있으면 할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제일 중심적 존재, 중심이라는 존재는….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됩니다. 봉사를 많이 하고 희생을 많이 한 사람이 중심이 됩니다. 선의 도리의 세계는 난 그렇다고 봅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아들이라 하더라도, 그 가족을 위하면 할아버지가 계시고 부모님이 계시더라도 그가 중심존재가 됩니다. 그 아들이 20대 전후한 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할아버지보다 아버지보다 가정의 열 사람 전체를 위하게 될 때는, 그 아들이 할아버지를 넘어서 아버지를 넘어서 중심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입니다. 추상적이 아니예요. 이건 생활 가운데 모두 나타나는 거예요. 사회 공의에 의해서, 공적 생활권 내에서는 언제나 그런 원칙을 따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