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집: 섭리적 현시점 1972년 06월 05일, 한국 중앙수련원 Page #295 Search Speeches

아브라함의 위대성

자! 노아 할아버지의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아브라함으로 넘어갑니다. 아브라함도 할아버지입니다. 옛날에는 전부 다 할아버지 시대라구요. 요즈음 통일교회 시대는 할아버지 시대가 아니고 무슨 시대라고 합니까? 「청년시대」 청년시대라고 해서 할아버지들은 섭섭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청년들이 싸워 이겨 가지고 상금을 받게 되면 할아버지한테 갖다 보관해요. 그러면 된다구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구요.

아브라함 할아버지도 갈대아 우르의 자기 고향 집에서 잘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끌어 내어 이방으로 데리고 다니다가 제물 드리라고 해서 제물을 드리는데, 그 제물도 아브라함이 드리겠다고 했어요? '하나님! 제가 제물 드릴 제단을 다 준비했으니 당신께서 받아 주시겠습니까, 안 받아 주시겠습니까? 하고 기도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바라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와서 '야 네가 그만큼 수고했으니 내가 너를 축복해 주겠다.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보다 땅 위의 모래보다 더 번창하게끔 축복해 줄 테니 3대 제물을 드려라'고 했기 때문에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또, 제사를 드리려고 제물을 쪼개는데 조그마한 비둘기 한 마리쯤이야 쪼개지 않았으면 안 쪼갠 것이지 그게 뭐 큰 문제가 되느냐는 거예요? 안 그래요? 그 조그마한 비둘기를 쪼개려니 칼이나 댈 데가 있어요? 그거 하나 안 쪼갰으면 안 쪼갰지. 그렇게 노발대발이예요? 축복해 주겠다는 하나님이 비둘기 한 마리 안 쪼갰다고 '너의 후손이 4백년 동안 종노릇을 하게 되리라!'고 하셨으니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았겠어요? '이거 사탄이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훌륭한 점이 무엇이냐? 그것을 무엇보다도 두렵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벌을 내리시게 될 때, 그것을 자기가 죽는 것보다도 더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수를 저질러 놓고 무엇보다도 큰 충격을 받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받드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 아들을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받게 될 때, 자기 아들을 잡아 죽여 가지고 충격받았던 그것이 해소될 수 있다면 당장 실천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결심을 하기 까지 내적으로 하나님이 분부한 말씀을 얼마나 신중히 생각했겠느냐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세에 독자로 얻어진, 그것도 하나님이 축복해서 기적적으로 얻은 아들을 잡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는 주더니 이제는 또 잡아 제사드리라구요? 그것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애요? 전부가 모순입니다. 전부 다 인간의 머리로 사람끼리 하는 일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아버지도 그렇게 복을 빌어 주고 그랬으면 그렇게 안할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을 해야 되느냐? 여기에는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곡절이 있더라 이거예요. 대개 인간은 자기 이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이상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자기를 빼 놓고는 사랑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플러스 시켜 가지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자기를 부정해 가지고는 무엇이든지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사랑의 길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무슨 사랑을 찾으려 했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씨족을 부정하고 자기의 친족을 부정하고, 무슨 가정과 무슨 씨족을 찾았느냐?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가정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씨족을 그려 나왔던 대표자가 아브라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 자식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즐거워할 수 있는 하나의 씨족을, 하나의 나라를 그는 마음속 깊이 바랐던 것입니다. 그 바람이 어떠한 어려운 환경보다도 컸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숱한 집시의 행로도 무난히 돌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컸기 때문에, 또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나 강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자신이 확실하게 서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을 다 제쳐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이 지시한 길만을 따라갈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애급에 가서 자기 아내까지 빼앗기는 자리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될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했겠어요? 집에서 끌어내더니 나중에는 아내까지 바로한테 빼앗기게 되었으니, 될대로 다 되었다구요.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바로에게 사라를 빼앗긴 것을 원망하지 않고 '하늘이여!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하심이 틀림없거늘 나를 세워 가지고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은 기필코 손해보기 위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사라를 빼앗기고 나서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언제는 집을 떠나라 해 가지고 수십년 나그네 생활을 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아내까지 빼앗기고 이국 땅에서 완전히 몰려 죽게 됐구만. 원망스러운 하나님이여!'라고 참소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사랑이고 뜻이고 난 다 모르겠소. 하나님이고 뭐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소. 이건 뭐 갈수록 태산이구만' 하고 참소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믿을 수 있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구요.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훌륭했다는 것은 조건없이 믿었다는 점입니다. 만일 아내를 잃어버리고 '하나님, 내 마누라 찾아 주소'라고 항의하는 쪼로 기도했다면 그 사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찾아 줬을까요? 사탄이가 틀림없이 사라의 모가지를 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라를 바로의 품안에서 빼앗아 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감복되고 하나님 앞에 참소하던 사탄까지도 감복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던 사탄의 입장이 무색할 수 있는 자리에서 축복을 해주어야만, 자랑의 축복이 되고 참소의 축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대하고 싶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당신의 뜻을 위해서 내 가족을 끌고 나오게 될 때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각오를 했사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당신을 위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사오니 당신이 쓰고 싶은 목적이 있거들랑 마음대로 처리하시옵소서. 당신의 깊으신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라를 제물삼아 가지고 하늘의 뜻을 이룰 수 있으면 그 이상의 축복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아브라함은 기도했을 것입니다. 반대하는 입장에서 기도를 했다면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라는 틀림없이 바로 궁중에서 귀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체되는 아브라함 자신이 뜻을 대하는 태도, 어려운 환경이면 어려운 환경에서 그 때를 수습하는 태도야말로 원수가 참소의 조건을 세울 수 없는 태도였고, 인간의 사정을 잘 알지만 눈물어린 심정을 가지고 어려운 자리로 명령을 하는 하나님이 도리어 내정적으로 더 격한 자리에서 붙안고 싶고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심정의 자극이 일어났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불신의 후손된 아브라함을 통해 가지고 신의의 새로운 심정적, 동정적 기원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역사가 땅에 머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그냥 그대로라는 겁니다. 사탄세계와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의 위대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나오던 아브라함이 그런 위대한 심정을 가지고 모든 시련 기간의 때를 넘김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 이상의 축복을 받기에 당당한 아브라함이 됐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