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집: 정성과 극복 1971년 03월 1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22 Search Speeches

하늘을 모시려면 그- 상'하" 정성을 "-야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그 골수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지니고 꾸준히 정성들이며 가는 사람의 가는 길은 올바른 길입니다. 정성은 은밀히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과 더불어 몸 마음으로 맞이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느냐? 그러기에 여기에서 하나님을 보고 싶으면 내가 얼마나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 만나고 싶으면 얼마나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정성들이며 만나고 싶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늘 아버지의 착함과 귀함이 머무를 수 있는 자기 자체의 내적인 인연을 갖추고 하늘을 위주로 하늘의 가치를 대신한 입장에서 아버지를 얼마만큼 모셔드렸느냐? 여러분이 오관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있겠지만 내가 듣되 얼마만큼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들어 봤느냐? 볼 때는 얼마나 그런 마음으로 보아 봤느냐? 또 내가 느끼되 얼마 만큼 정성을 다하는 자리에서 느껴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성들인 것이 이 정도면 되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지극히 선한 그분을 맞이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정성의 터전에 의해 되었느냐 할 때에 여러분이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인 정성의 기준에는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최고의 선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정성을 상대적인 터전으로서 인정할 수 있겠느냐 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을 가해 가지고 정성을 다하는 자리에는 그 자리가 부족한 자리요 천한 자리일지라도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기 위해 육신의 높고 영광된 자리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지옥에라도 가고 싶다는 마음 가지고 여기가 도리어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 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찾아가서 눈물 흘린다면,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이 되어지고 관계가 맺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필히 신앙생활을 통해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정성을 들였으니, 아버지, 이제는 나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내가 정성을 들일 만큼 들였는데 하늘은 무심도 하시지 내 사정을 몰라주시네'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시조 아담 해와가 죄를 범한 그날부터 죄를 범한 이것을, 마음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심어진 죄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해 온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을 짊어졌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걸어 나오셨으니 나도 어떻게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면서 가는 신앙길에는 눈물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미남 미녀라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영광의 모습을 갖추고, 세상을 대하고 남을 수 있는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신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리어 정성을 들이는 데 방해는 될지언정 도움은 못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못나기를 나 이상 못난 사람이 없는 것이요, 세상의 죄인 중에 나 이상 죄인이 없다는, 역사적인 비참함을 느낄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일시에 꺼져 버린다 해도,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하더라도, 하늘이 계시다면 이왕 터트려 버릴 바에는 흔적도 없이 터뜨려 버리고,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모체로 해 가지고 다시 흩어진 것을 빚어낼 수 있는 당신의 은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말하면 죽고 남아진 생을 중심삼고 부활의 혜택을 바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몸부림치는 자리에서 생명의 인연이 교차되고 생명의 인연이 결정되는 것이지, 스스로 당당한 입장에서 '내가 이만하면 됐지' 하는 자신을 가지는 거기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깊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버지에 대해서 얼마만큼 정성을 들였느냐? 내가 아버지를 보고 싶다 할 때 얼마나 정성의 대가를 치르면서 보고 싶어했느냐? 아버지와 같이 가고 싶고, 같이 살고 싶고, 아버지가 원하는 나라와 아버지가 원하는 환경을 맞이하고 싶다 하더라도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인 마음을 가지고 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