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집: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명 1970년 02월 1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88 Search Speeches

우리가 다시 한번 명심해야 될 것

1970년대에는 이 민족 앞에 가로놓인 원한의 구덩이를 어떻게 타파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생애를 바쳐 싸워 나온 그 경험에 온갖 정성을 가일층하여서, 승리적인 결정을 다짐해야 할 것이 선생님에게 남아진 생애의 사명이요, 선생님을 따르고 있는 그대들의 사명인 것을 명심해야만 되겠습니다.

한국은 불쌍한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불쌍한 나라입니다. 사방이 원수들에게 포위당해 있습니다. 우(右)로도 갈 수 없고, 좌(左)로도 갈 수 없고, 앞으로도 갈 수 없으며, 뒤로도 갈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단 하나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여기에서 비상천(飛上天)하든가 날아 옮겨가는 그 길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죽음의 고비고비가 우리를 놓고 울타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과 더불어 깨지고 망할 수 있는 각오를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더불어 망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깨지는 자리에 섰을 때 부활의 역사가 있었듯이, 이 민족의 운명도 그와 같은 운명을 띠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왜 그러냐? 한국이 제 2이스라엘권의 역사를 상속받은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예수님이 민족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개인으로 넘은 것을 대신하여 국가적인 십자가의 형틀을 지고 넘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에도 한국을 위하여 먹어야 됩니다. 한국을 위함은 세계를 위함이요, 세계를 위함은 하나님을 위함입니다. 이처럼 전체가 하나로 결속된 자리에서 아침과 점심과 저녁 식사를 대하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나의 호흡을 통하여 울려 나오는 고동소리를 이 민족을 통하여 해원성사하게 해 달라고 분부하시는 하나님의 절규로 듣고, 내 피를 퍼부어 이 민족의 한을 해결짓겠다고 제물의 자리를 솔선해 나가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이것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이날을 축하해야만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기쁨의 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설사 이날이 우리 자체의 기쁨의 날이 되지 못할지라도 미래의 기쁨을 대신할 수 있고, 또 상속받을 수 있는 날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회상하여 마음속에 명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내가 아무리 비참하여도 우리의 비참한 동기의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억울하여도 우리의 주체되시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 땅 위에서 죽음길을 간다 하더라도 일생의 죽음은 한번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영생의 노정을 바라보며 나오시는 길 앞에 있는 타락한 후손들을 사망권내에서 부활시키기 위해 수고해 오셨습니다. 사망의 고빗길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옥동자를 볼 수 없는 것이 천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죽은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숱한 죽을 고비와 죽음을 체험하게 하지 않고는 부활시킬 수 없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몇천만 번 죽음의 수난을 당한 아버지의 내적 심정의 상처를 헤아려 볼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한 번 죽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상심하시고, 아버지 앞에 피해의 결과가 되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길을 맞이해도 한을 가지고 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며 가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내가 죽어 민족을 살릴 수 있다면 그 민족은 하나님께서 같이 하실 것이고, 내가 죽어 세계를 살릴 수 있다면 그 세계는 하나님과 함께 남아질 것입니다.

나는 갈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남아지는 일은 영원한 승리의 터전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남을 수 있는 민족을 바라셨던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고개를 결단지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그 내심의 애절한 사연은 천정의 사연과 통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은 혼자요 하나님은 무한인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고통은 한번이요, 하나님의 죽음의 고통은 무한인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마음과 세포와 뼈에 같이 느껴지는 체휼적인 자리에 들어간 예수님은 죽음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위하여 책임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희생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충(忠)의 자리에 나갈 수 없는 것이요, 또 세계적인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를 원하는 사람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그 반열에 동참할 수 없는 것이 역사적인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현이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행적에 기억될 수 있는 무리가 되고, 하나님 혈족의 왕자 왕녀의 인연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이 걸음 가운데 천만보의 죽음길이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가치기준으로 봐도 응당 비례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