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집: 끝날에 남아질 아버지의 참아들딸 1959년 07월 26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21 Search Speeches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르라'고 한 뜻

우리는 심판의 한날을 두려움의 날이라 믿고 그날을 피하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나타나서 `온 천하에서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철칙의 제1조입니다. 성경 내용 중의 내용이요, 복음의 중심 중의 중심입니다. 역사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역사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하여 역사와 더불어 살았다 할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만, 역사와 더불어 싸워나온 예수와 역사와 더불어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심판 날에 주님이 오셔서 만반의 준비를 하여 영광의 세계에서 공중 혼인잔치를 벌이고, 자기를 참석시켜 줄 것이라 믿고 있지만, 가소로운 놀음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안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또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이 오셔도 반대 할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놓인 우리는 역사적인 죄상 앞에 유린을 당한 혈통을 받은 후손입니다. 그러기에 천만번 유린을 당해도 역사와 더불어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수고와 하나님의 슬픔 앞에 황공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섭리하시는 아버님의 뜻이 있기에, 찾아 주신다는 그 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될 수만 있으면, 할 수만 있다면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당? 만일에 그런 심정을 버리고도 천당을 간다면 천당은 아무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당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판대에 나서야 할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슬픔 가운데 계심을 선포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역사의 경로를 거쳐오신다는 것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예수의 슬픔은 무엇인가. 참이요 옳은 입장에 계시면서도 거짓이요 가장된 것으로 꾸며져서 유린당하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슬픔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고통은 무엇이었는가. 친아들 딸을 찾아가는 길을 막고, 사랑하는 신부를 찾아가는 길을 막고 유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아들 딸을 찾아가는 길, 아들 딸을 만나는 길은 갈보리산상을 넘어야 할 길이기에 이 땅에는 예수시대의 골고다가 남아 있는 동시에 끝날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하늘의 영광을 대신해 오시는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재림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은 죽어 부활하신 예수를 그냥 만날 생각 마십시오. 죽어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기 전에 여러분 자신들이 살아서 세계적인 골고다의 고개를 넘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골고다를 넘을 줄 알아야 돼요. 세계적인 골고다에 마음과 피 살, 나아가 생사를 걸어 놓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서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7년 대환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신부로서 환희로운 주의 동산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6천년 역사노정에서 고통을 대하여 싸워 이긴 승리의 왕자이며, 슬픔의 심정을 품는 데 있어서도 인류를 대표한 슬픔의 왕자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신부로 맞이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의 길을 가는 데는 절대적으로 행복의 요소를 부정합니다. 왜 그러는가. 하나님은 기뻐해 보지 못하신 분이십니다. 지으신 피조물에게도 주인 행세를 해보지 못하셨고, 축복을 하여 하나의 가정을 중심삼고 즐겨보려 하셨던 아담 해와마저 사탄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늘 땅에 탄식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 하에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사탄 주관 하에 들어가고, 아들 딸은 물론 만물까지 유린당하는 것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슬픔 이상의 슬픔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슬프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품은 마음 그대로, 역사와 더불어 또 다시 슬픔을 거듭해 오셔야 했던 하늘임을,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