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집: 완전한 탕감 -0001년 11월 30일, Page #208 Search Speeches

탕감의 과정을 거쳐 나오신 선생님

선생님 자신을 중심삼고 볼 때, 또 지금까지 선생님의 가정이 생활해 나온 것을 쭉 되돌아보게 되면 하나님은 모질고 무자비하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때에는 축복을 해주시지만…. 선생님의 가정은 증조부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때에 와서 탕감을 받았습니다. 축복 받은 후에는 반드시 탕감받게 된다는 거예요. 반드시 탕감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축복 받은 후에는 반드시 탕감을 받았습니다. 열만한 축복을 받았으면 반드시 그만한 탕감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지탱시키고, 그 씨를 남기기 위해서는 탕감을 받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가정을 위한 씨가 아니라 종족을 위한 씨를 남기려면 그 가정에 축복한 이상의 시련을 사탄이 퍼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열만한 축복을 주기 위해서는 스물, 혹은 백만한 시련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탕감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하나님의 불리움을 받기까지 선생님의 가정에 상당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가산이 탕진되었고, 인명 피해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혼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사자로부터 전부다 맞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축복을 받으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이 그 가정을 사탄세계에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세계에서 들이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선생님이 이 뜻을 찾아 나올 때까지 그 배후에는 삼대에 해당되는 탕감의 인연이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대에서도 탕감을 받았고, 아버지 대에서도 탕감을 받았고, 내 대에서 형님까지 탕감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 대에 있어서도 슬픈 일이 벌어져야 했고, 아버지 대에 있어서도 슬픈 일들이 일어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거치지 않고는 탕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대를 보게 되면, 3형제 분이 계셨는데 막내 할아버지 되시는 분은 목사였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3·1 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전국의 책임자들과 내적인 계획을 해오셨습니다. 그러시다가 오산학교 직원과 생도 및 교회신도, 오산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벌이셨습니다. 이때 주모자로 일헌에 체포 당함으로써 옥고의 생활을 2년동안 하셨습니다. 옥고에서 풀려나오셨어도 편안하게 고향에서 살지 못하시고 일생 동안 타향살이를 하셨습니다. 일경의 박해로 피신 다니시다 강원도 정선에서 생애를 마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대에 있어서 삼촌도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객사하셨을 것인데, 무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탕감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비운의 생애를 거쳐야 됩니다. 이렇게 3대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상적인 투쟁의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즉, 복귀의 터전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형님은 동생인 나에 대해서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완전히 탕감할 수 있는 기대가 자연히 조성된 것입니다. 형님의 신앙은 철저했습니다. 형님은 6.25사변이 일어날 것도 미리 아셨으며, 우리 민족이 해방될 것도 미리 아셨습니다. 모든 어려운 문제를 영계의 지시를 통해 해결하는 신앙의 태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형님에게는 신병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님은 약을 써서 고치겠다는 마음은 꿈에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도로, 신앙으로 병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런 신앙기준에서 그 병을 고쳤던 것입니다.

우리 형님은 동생인 나에 대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역사상에 수많은 형이 있었고 수많은 동생이 있었지만 내 동생은 역사적인 동생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뭐라고 하면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내가 평양에 가 있을 때, 그때는 복귀섭리 도상에 있어서 크나큰 역사가 있을 때였는데 내가 부탁하는 것은 보통 생각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형님은 이런저런 내용을 갖추어 동생을 위하여 도왔습니다. 그 부탁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그 일을 행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형님이었습니다.

이러한 형님과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남북이 갈라진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사정이 확대되어 국가의 사정이 되었습니다. 형님과 동생이 한자리에 모여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것과 같이 지금 남.북한이 똑같은 사정이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형님은 북괴의 손에 피살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남한 땅에 나와 이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땅에 남아 있는 우리 일가 친척은 말할 수 없는 수난과 역경 가운데 살다 돌아가셨거나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과정을 중심삼고 볼 때 반드시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에 있어서도 제일 가깝던 친구들, 하늘에서 축복해 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친구들은 다 데려갔습니다. 다 제거시켜 버렸습니다.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다 잘라 버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평안북도 사람도 있었고 황해도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제일 가깝던 친구들을 다 데려가 버렸습니다.

또, 형제를 두고 보더라도 내가 제일 사랑하던 동생을 데려가 버렸습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무슨 죄인지는 모르지만 데려갔습니다. 그는 내 바로 손아래 여동생입니다. 우리 가정에는 딸이 많았지만 이모댁에는 딸이 없었기에 이모의 간청에 의해 그 동생은 이모댁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언제나 그 동생을 위해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 동생은 오빠에 대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빠로서 동생이 좋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라도 다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대까지도 다 잘라 버렸습니다. 여동생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남동생도 데려갔습니다. 또, 선생님 자녀 중에서도 성진이의 동생인 희진이도 데려갔습니다. 아들로 보면 둘째를 데려간 셈입니다. 딸도 둘째를 데려갔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탕감은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