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집: 제2회 부모의 날 말씀 1961년 04월 1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27 Search Speeches

사위기대의 삼대상 위치를 갖춰야

오늘날 모든 운동작용이라는 걸 보면 반드시 횡적운동과 종적운동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부모의 인연을 거쳐 가지고 세계적이며 횡적인 상대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고받고 해야 우리의 세계관을 중심삼고 나갈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는 삼대상 기준을 안 가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판서하시면서 말씀하심) 나와 하늘과, 이것이 땅 위에 있어서의 평면적인 존재와 공동 목표로 하는 목적을 대하여 주고받는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삼대상 위치를 안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가졌다고 해 보라구요. 사위기대를 가졌다구요. 사위기대. 사위기대라는 것은 위로 하나님이 있고, 그다음에 뭐예요? 「아담」 아담이있고? 「해와」 해와가 있고, 그다음에는? 「자녀」 자녀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판서하시면서 말씀하심)

여러분, 존재하는 것은 3대상 기준을 가져야 됩니다. 상대와 대상은 어떻게 다르겠어요? 상대와 대상은 다릅니다. 상대는 그냥 대하는 거예요. 무엇이든 존재의 위치를 가지게 되면 반드시 상대기준을 조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상대는 그냥 대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대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주고받음으로써 공동 목적의 가치적 과정을 거치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물은…. 원리원본에 이렇게 타이틀이 돼 있지요. 창조이상으로 된 아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존재물이라는 것은 반드시 3대상을 갖추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만일 여기 서 있으면 내 개체가, 존재하는 여기에 있어서는 내 마음과 몸과 하늘과는 반드시 제1 대상이예요.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말한다 이거예요. 주고받을 수 있는 제1 대상이예요. 주고받을 수 있는 위치예요. 마음과 하나님과는 제1 대상이요, 그다음에는 내 몸과 양심이 제2 대상이예요. 이것이 `나'라 할진대, 남자면 남자 앞에 제3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이 여자면 여자 앞에는 남자라구요.

한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한 가정을 배경으로 해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을 한 단위라 보게 된다면 하나님도 이성성상이요, 부부도 이성성상이요, 내 아들딸도 이성성상으로 숫자적으로 3수 과정을 거쳐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것이 전부 다 주고받는다는 거예요. 이렇게 삼대상으로…. 이것을 다시 말하면 이것도 하나요, 이것도 하나요, 이것도 하나요, 이것도 하나요, 또 이것도 하나요, 그다음에 이것도 하나입니다. 이걸 따로따로 보면 하나님 앞에도 대상이 셋이예요, 하나 둘 셋. 아담 앞에도 하나 둘 셋이요, 해와 앞에도 하나 둘 셋이요, 아들딸앞에도 하나 둘 셋입니다. (판서하신 것을 가리키며 말씀하심) 안 그래요? 그렇지요? 「예」

삼대상 위치를 벗어나 가지고는 본연의 연결체를 갖춘 존재 위치를 결정지을 수 없어요. 그래 이것을 합한다는 것은 사위기대에 삼대상이니 삼사 십이(3*4=12), 12수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12수가 이걸 전체로 볼 때 모두 몇 수냐 하면 6수입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그렇게 되지요? 또, 전체로 보면 하나 둘 셋 넷이고, 갈라 보면 하나 둘 셋이예요. 천지의 수는 여기서 벌어져 나간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대상 위치를 갖지 않으면 안 돼요.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냐? 아담 해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전체적인 소원의 목적은 당장 하늘 가정으로서 창조주의 삼대상 기준을 완결짓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를 지은 목적은 자녀가 됩니다. 안 그래요? 따라서 아담 해와도 하나님이 있고 자기 상대만 있어서는 안 돼요. 자기아들딸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아들딸이 없으면 섭섭한 겁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딸만 있어도 안 되고 아들만 있어도 안 된다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라도 결여되면 섭섭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천지의 원칙적인 발판이 이렇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천지의 모든 힘의 작용이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그 동력적인 힘이 나로 하여금 정상적인 법도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상적인 힘의 가치로서 내 몸 마음에 작용하고 내 생활무대에 작용하게 될 때, 천지의 도수에 들어맞으니 내가 거기에 만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가 전부 다 여기에 움직이게 되는 새로운 이상적인 힘의 자극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진리에 입각하게 될 때에 소망을 가지게 되고, 소망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심정적인 사랑이 내 몸 마음에 체득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몸 마음에 뿌려졌던 것이 양심과 관계가 되고, 양심과 관계된 것이 몸과 마음과 관계되고, 몸과 마음에 관계된 것이 소망과 관계되게 되는 거라구요. 세상을 보게 될 때, 큰 목적으로 보면 그렇게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처한 곳에서 무엇을 대하든지 삼대상 위치를 벗어나서는 존재의 가치를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그래요. 무슨 일을 하든지 그렇습니다. 일을 해도 그렇고, 사랑 문제에 들어가도 그렇고, 혹은 가정 문제도 그렇고, 나라 문제도 그렇습니다. 나 개인의 문제, 내 마음과 몸에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 하나되어 가지고 반드시 그것이 말과 더불어 상대적 대상을 연결시키게 됩니다. 안 그래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삼대상 위치를 침범하면 반드시 존재의 기대가 무너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찌하여 인간을 지었느냐? 사위기대 원칙에 의해서 절대적인 천지의 도수를 맞출 수 있는 기준이 된다면 거기에서 천지의 조화는 벌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갈라 놓으면 하나님도 플러스 마이너스요, 전부 다 플러스 마이너스예요.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