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집: 개척자가 되신 예수의 실체 1959년 02월 0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26 Search Speeches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준행하지 않은 제자"

예수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예수를 이용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놀음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는 땅을 치며 울어도 그 마음을 풀 길 없고, 하늘 대하여 통곡하여도 이를 풀 길이 없는 서글픈 심정을 갖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사명의 노정이 남아 있는 연고로 그 마음을 억제하고 제자들을 대하여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심중에 사무친, 자신의 뼈살에 사무친 결심의 일단을 재차 증거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때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것은 예수의 말이지 자기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여러분! 요한의 모친이 자기의 두 아들을 끝날 영광의 자리에 세워달라고 할 때에, 답답하고 참담하였던 예수의 그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는 불쌍한 분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그렇게 훈계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제자들은 자기들이 기쁘다 하는 행동은 나타냈지만,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실천으로 보여 주고 가르쳐 주고 훈계해 준 것을 본받아 자기들이 예수님이 따르는 무리 앞에 본이 되고, 예수님을 높여주고 예수님을 섬기는 이런 제물적인 입장에는 서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제자들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자신들을 넘어 교단이 부르짖고 있는 것을 성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았고, 교단에게는 교단을 넘어 민족이 부르짖는 것을 성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았고, 민족에게는 민족을 넘어 세계가 부르짖고 있는 것을, 세계 인류에게는 세계를 넘어 하늘이 부르짖고 있는 것을 성사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심정을 어느 누구 한 사람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한 사정에 처해 있는 예수님,자기만을 대하여 달라는 몇몇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이러한 예수님에게 슬픔이 있다면 그 이상의 슬픔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천신만고의 지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배고플 때에는 떡을 만들어 먹이셨고, 그들이 때를 위하여 울 때 그들을 위로하셨고, 낙망하게 될 때에 팔복(八福)의 말씀을 통해 하늘의 축복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낙심할까봐, 혹은 떨어질까봐 염려하셨던 예수님의 심적인 애달픈 사정을 표현한 것이 바로 복음서의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한 가지 사정을 걸어놓고 말하면 말할수록 그 말씀을 듣고서 가까워져야 할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더 먼 자리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시는 예수의 심정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다 못해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대야를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내 도리는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하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이셨기에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슬픔을 느끼면서도 제자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신 예수님께서 이적 기사를 행하신 것은 기뻐서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쁘고 편안하여서 이적 기사를 행하신 줄안다면 큰 오해입니다. 여기에는, 이 땅에는 몸 둘 곳이 없고, 이 우주 안에는 의지할 곳이 없으니 하늘을 대하여 호소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장한 경지에 계셨던 예수의 간곡한 모습을 여러분은 바라보아야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동정을 안 해줄 수 없는 서글픈 사정에 처하여 손을 들어, 아버지시여! 하고 부르게 될 때에 여기에서 이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극히 슬픈, 뼈살이 녹아지는 슬픈 장면에서 외치는 그 한 사정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이 이적 기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그 이적 기사를 예수가 태만해서 혹은 좋아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벳세다 들에서 5천여 무리가 `예수여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요, 택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십니다'라고 손에 손을 흔들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처럼 이익이될 수 있는 입장일 때는 찾아왔으나, 시일이 지나 예수가 자기들과 심적 기준이 달라지고, 사정이 달라지고, 표준이 다른 경지에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니 그들은 예수를 배반하고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걸어온 실천노정에 있었던 현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