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집: 인류의 새로운 장래 1975년 04월 25일, 한국 전주 실내체육관 Page #110 Search Speeches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위하고 인류를 절대적으로 위하라

우리 인간은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위치는 아침이냐, 혹은 낮이냐, 혹은 저녁이냐, 혹은 밤이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사람들은 아침 나절과 같고, 청춘시절은 점심때와 같으며, 중년을 넘어선 사람들은 저녁때와 같습니다. 그리고 70, 80을 넘어선 사람들은 그야말로 어두운 밤을 맞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나그네의 신세다 이거예요.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타락한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한 사실을 알고 계신다면 하나님에게는 타락한 인간을 그 본향의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냥 무턱대고 인간을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과정을 통해 종교라는 하나의 수련과정을 거치게 하여 단계적으로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거쳐 하나님을 위할 줄 아는 길을 똑바로 가르쳐 주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에서는 어찌하여 온유겸손하라느니. 희생봉사하라느니 하느냐? 그렇게 말하는 원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왜 그렇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왜 그렇게 해야 그 나라에 갈수 있느냐? 그것은 우리 본향의 땅이 그와 같은 조직적 구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가서 박자와 호흡을 맞게 하려니, 여기에서 그런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자체를 부정하고 희생봉사를 강요하는 원칙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시대를 거쳐 종교가 이와 같은 내용으로 희생봉사를 강조한 사실은 그 본향의 법도를 이 땅 위에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역사과정에 그러한 종교가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역사과정을 통해 섭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됩니다. 그 종교가 가르쳐 주는 최고의 교리는 무엇이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위하고 인류를 절대적으로 위하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신구약 성서가 66권이라 하더라도 그 66권은 이 두 마디에 결론이 지어집니다. '위해서 존재하라' 그 뜻을 세우기 위한 것이 신구약 성서이며, 또 수많은 경전이 이 두 마디에 모두 결론이 지어져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역설적인 논법이 어디 있습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말하면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진리요. 이 내용이 기독교의 생명의 주추를 이룰 수 있는 하나의 근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근원적으로 저 본향의 도리에 일치될 수 있는 근원이요, 상대적 관계를 지닌 내용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는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에 간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까? 그게 어디에 근거한 내용입니까? 이것은 본향 세계에 의해서 천지의 존재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삼고 볼 때, 이것은 역설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에는 원칙적인 말입니다. 그러면 원칙적인 말이 여기에서는 왜 상충이 되느냐? 반대의 결과로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것이 타당한 논리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종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