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집: 복귀역사와 만물의 날 1966년 06월 1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47 Search Speeches

종교의 가르침-나를 완전히 부정하라

여러분 ! 이 만물의 날이 나올 때까지 어떤 노정을 거쳤는지 아십니까?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벗어나는 노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는 무엇이냐? 이 세계는 타락권내에 있기 때문이 하나님의 창조목적 세계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접붙이는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는 참감람나무요, 너희는 돌감람나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의 가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예수님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접붙여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접붙이려면 참감람나무를 잘라야 됩니까? 돌감람나무를 잘라야 됩니까? 돌감람나무를 잘라야 하는데 성경에는 참감람나무를 잘랐습니다. 그러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저 좋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린 것도 일리가 있긴 있지만 그렇게 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제 거꾸로 돌감람나무인 여러분이 잘려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를 어떻게 잘라야 되겠습니까? 발목을 잘라야 합니까? 나무를 자르는 데는 밑을 자르는 것처럼. 사람은 목이 잘려져야 합니다. 목을 자르면 죽게 되지만 죽지 않으면 부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 어떠한 심판을 하시려고 하는가? 완전 심판을 하시려고 합니다. 100퍼센트 이상 150퍼센트까지 완전 심판하시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타락한 세상의 모든 것을 축출해 버리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

인간은 하나님을 기쁨과 영광 가운데로 모셔야 했었는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서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섭리의 인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중심한 문화세계를 이룩하려고 하십니다. 이러한 세계를 위해서 대심판의 역사를 벌이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교육이나 주의, 사상,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완전 부정해야 합니다. 만약 100퍼센트를 부정해야 되는데 98퍼센트까지만 부정하게 되면 2퍼센트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완전 부정한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들은 인간적인 소망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노아도 그랬습니다. 그는 배를 만들었는데 강가에서 만들지 않고 산에다 그것도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 이후 400년을 지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고향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고향 땅에서 그때까지 재미있게 살던 친척, 종족을 모두 버리고 행랑 보따리를 싸서 그 곳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국경을 넘어 애급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자기의 부인을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야 하는 입장에까지 처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심정의 생활에 있어서 최후의 처량한 자리, 부정의 자리에까지 나갔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사 드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을 믿었겠습니까?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바로 궁중에 갈 때 도중에서 하나님이 죽이려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부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부정시키고 사탄을 분립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리의 공법. 이러한 법도로 완전 부정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종교는 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선포입니다. 통일교회의 선포이기 이전에 예수님의 선포라는 것입니다. 또한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어머니에게는 딸이, 시어머니에게는 며느리가 원수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란 무엇이냐? 아버지가 잘했다고 해도 그 아들이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이어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리 원칙에도 용서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완전 부정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