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집: 인연의 행로 1972년 07월 16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39 Search Speeches

먼저 나 자신을 정비해야

격동하는 세계사적일 현실을 바라보게 될 때에, 현실의 어떠한 주의나 사상도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신앙관과 생활이념을 갖고 나서게 될 때는, 그 신앙관과 생활이념을 통해서 개혁이 벌어지고 새로운 세계의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통일사상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사상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이 이념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념은 뭐냐, 생각입니다. 생각하는 상응사상입니다. 사상이 이념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념은 체계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으로 전진적인 체계화 놀음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상은 이념을 전개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이념은 비로소 생활법도가 되어 실천장을 형성하게 되고, 그것이 새로운 문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실천장에 있어서는 이념이 고차적이니만큼 행동도 고차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야 할 목적관에 대한 강력한 생각이 앞서야 됩니다. 구상하는 생각, 그것이 앞서지 않고는 안됩니다. 자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게 될 때, 자신이 있느냐고 물어 보지요? 조금만 다른 새로운 것을 하더라도 '너, 자신 있나?' 이렇게 묻지요? 일을 해보기 전에는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텐데,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네 마음이 결정돼 가지고 그 이상 넘어설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말은 뭐냐 하면, 신앙적으로 볼 때에 현재에 당면한 문제를 극복할 수있는 마음의 방향이 갖춰져 있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갖춰져 있으면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가기 때문에 변치 않고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적기사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그래요. 삼신(三神)이 동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동해야 되고, 내 마음이 동해야 되고, 물심이 동해야 됩니다. 병난 사람을 보면, 그 몸뚱이가 수척한 것을 보고 자기가 아픔을 느끼면서 이 병자를 하나님이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힐 것이냐? 이래 가지고 부모의 심정으로 측은하게 보면서 병자라는 생각이 없이 그를 붙들면 대번에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를 병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잃어버린 아들딸, 십년 혹은 천년 동안 찾던 아들딸을 만난 것 같은 사랑의 마음이 여기에 덮어져 그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이 벌어지면 대번에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적이 뭐 다른 게 아닙니다. 그것을 동화시킬 수 있는 자리, '그는 나요 나는 그다' 하는 자리, 창조원리대로 둘이 하나되는 데는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게 되면 재창조의 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소원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재창조의 능력이 가해져야 새로운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어떤 문제를 중심삼고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이루어질지 말지…. 그게 아니라구요. 여러분은 이러한 비운의 운명을 불신하고 나섰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문제되는 것이 뭐냐? 여러분 자체를 정비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라고 했는데,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나 자신이 되었느냐? 내가 누구를 더 사랑했느냐 이겁니다. 먼저 나 자신을 정비해야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잖아요?

여러분을 보면 여러분도 그렇다구요. 자기의 남편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남편이다 이거예요. 그 사람이 총각으로서 자기와 결혼했고 일생 동안 자기만을 위하고 말이예요. 남성으로서 세계에 둘도 없는, 참 존경할 만한 남성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과거에 실수가 있었다고 하면 이는 언제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지 않고 숨기고 산다고 하더라도 일생 동안 죄책감을 받는 거라구요. 남편이 잘 해주면 잘 해줄수록 죄책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마음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그분 앞에는 순수한 여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냐 이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순수한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순수하지 못했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차원 높은 자리에서 새로운 심지(心地), 마음의 밭을 어떻게 개발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인데, 우리는 타락의 후손입니다. 이것은 배반이예요. 여러분의 조상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얼마나 배반했겠습니까? 배반자의 후손들…. 이게 또 둥글다면 모르겠습니다. 얼럭꿍 덜럭꿍 제멋 대로, 될 대로 돼 버린 것이, 나는 이래뵈도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