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집: 전진과 후퇴 1970년 11월 2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14 Search Speeches

기도로써 커지" -의

인간은 제한된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인격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한한 작용의 영역에 어떻게 들어가서 접선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고착된 의식 관념을 가지고는 자아주관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참선을 통하여 무의 경지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먼저 자각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도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더 큰문제입니다. '나'라고 하면 몸과 마음이 합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나' 가운데서 몸을 떼어버린 마음은 무엇이냐?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다 하는 인식이 나로 말미암아 의식된 것이라면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무아경인 순수한 자리에서 '내가 이렇다'라고 인식된 것이어야 완전한 것입니다. 그런 초자아적인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예언을 할 수 있는 것이요,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타락한 자리에 갖다 놓아도 스스로 뛰쳐나와 생명을 주관해 가지고 기쁨의 자리에 생명을 이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한히 진전할 수 있는 인격관이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바탕은 순수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열의는 지금까지의 그런 열의가 아니라 새로운 열의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걸 길러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길러지느냐? 기도로써 길러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내가 어제 저녁 수택리에 가서 이요한 목사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이요한 목사가 하는 말이 오전에 강의할 때는 은혜가 있는데 오후에 강의할 때는 은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성을 덜 들였느냐 하면, 오전과 마찬가지의 정성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전과 오후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은사의 계열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후에는 '하나님, 오전과 다른 어떤 은사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했어야 했습니다. 많은 기도를 안 해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실 것인가를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강의를 했다면 그 자리는 은사의 분위기로 화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심령생활에서 많이 체험을 해야 됩니다.

설교를 할 때도 제목을 정해 가지고 나와서 설교해서는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생명을 새롭게 변혁시킬 수 있는 설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한계권내의 하나님으로밖에 활동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자기 계획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할 때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안테나와 같은 입장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땡하고 치면 같은 소리를 내는 공명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차를 보면 땡 하고 치는 것이 있으면 그 치는 것에 자극되어 윙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것과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은 순수한 안테나처럼 되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사심없이 단에 나설 때, 그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은 임재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면 이것을 많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얼마나 심각해야 되고, 얼마나 공적이어야 되고, 얼마나 순수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자리는 그야말로 초조한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연결되면서부터 새로운 인간의 재창조가 벌어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신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음성으로 들리는 것이며, 자신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도생활을 조금이라도 한 사람들은 아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