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집: 미처 몰랐습니다 1972년 08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7 Search Speeches

하나님은 어떠한 길을 통하- 우리와 관계맺을 것이냐

그러면 그보다 더 나아가서, 그런 인류를 넘어 정성을 들여 가지고 영적 체험을 하고 있는, 혹은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있는, 혹은 초연한 세계를 친히 느끼며 살고 있는 그러한 특별한 유(類)의 사람들, 다시 말하면 영통하는 사람들, 혹은 진정한 의미의 도의 기준에서 최고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은 과연 영적인 세계의 인연을 갖고 있는, 또 그 체험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어디서부터 출발하였으며 어떠한 과정을 어떻게 거쳐서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아느냐? 그들도 확실히 모르는 것입니다. 영계에 있어서 그들 앞에 분부해 주고 혹은 지시해 주는 그 일은 할지언정, 그것이 어디서 출발하여 어떠한 내용과 어떠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현재의 자기를 통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아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시대에 있어서의 바울을 보나 베드로를 보나 그들은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본질삼아서 했느냐 하면, 하나님을 본질 삼아 가지고 한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이 세계면 세계, 혹은 그 나라면 나라 앞에 어떠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 하는 문제, 그 문제의 근본적인 유래로부터 그 결과에 대해서 확실히 모르고 허덕이며 움직여 나갔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신령역사로 말미암아 핍박의 와중을 넘어설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민족을 거쳐 세계적으로 되지 못하고 국한된 내용으로 남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근본 원인이 어떻게 되어서 그런 영적인 현상이 자기들에게 미쳐지고 또한 그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종착점을 향하여 갈 것인지 그 방향을 확실히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있었던 신령한 역사들이 과정에서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재 기독교의 신학자들은 신령한 역사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면, 삿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찾아가는 것은 위험하니까, 가 봤자 정상적인 목적을 바라볼 수 없는 결과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에 그나마도 인정하지 못하고 막아 버리는 현대의 신학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학을 배워 가지고 교회를 인도하고 교회를 책임지고 나가는 사람들이 교역자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그들은 교역자들로서 그런 것은 알 바가 아니라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길을 통하여 우리와 관계를 맺을 것이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진리를 통하여 관계를 맺는데, 이때는 말을 하여야만 됩니다. 서로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말을 통하여 사정을 서로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정이란 현재 당대의 사정이 아닙니다. 그런 사정을 가지고는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정이 오래됐으면 오래됐을수록 그 사정을 친구와 더불어 나누고, 그 사정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사정을 친구와 같이 나누어 가지고 그 어려움을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자리가 벌어지게 될 때에 참다운 친구도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자리에서 참다운 인연도 맺어질 것이 아니겠느냐?

서로서로가 자기의 슬픔이라든가. 혹은 고충을 깊은 자리에서 나눌 수 있는 내적 인연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외적으로 부딪쳐 오는 환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인 문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적 인연이 보다 보람된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러면 그 외적 환경을 넘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당한 문제보다도 내적 인연이 약할 때에는 외적 문제를 극복해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같은 운명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동료간, 혹은 관계, 인연을 두고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냐?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오늘날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려면 어떠한 자리에서 관계를 맺으시겠느냐? 피상적인 말을 가지고 관계를 맺으시겠느냐, 진지한 입장에서 뼛골에 사무치는 역사적 내용을 가지고 토로할 수 있는, 사정이 통하고 심정이 가중되는 자리에서 인연을 맺으시겠느냐? 피상적인 말을 가지고 인연을 맺는 것은 피상적인 사건을 넘어설 수 있는 동기는 될는지 모르지만, 생사의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할 수 있는, 자기 일대에 한번밖에 없는 중차대한 문제를 앞에 놓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이 된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