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집: 중요한 사항 1972년 11월 1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77 Search Speeches

이상적으로 부-된 환경과 반대의 입장- 서게 된 것은 타락 때문

여러분은 뜻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더우기나 통일교회 교인들은‘뜻 성사다. 뜻이다’하는 이런 말을 하는데, 그 뜻 자체가 무슨 뜻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물론 그 뜻은 하나님의 뜻이자 우리의 뜻이 되어야겠지만 우리의 뜻, 그 뜻은 환경의 뜻으로 남아지는 것을 여러 분이 알아야 된다구요.

뜻은 내가 있기 전에 이상적 가정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러한 환경으로 되어 있어야 된다구요. 이상적 가정이 있기 전에 이상적 씨족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상적 씨족이 있기 전에 이상적 나라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상적 나라가 있기 전에 이상적 세계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넘은 그 이상적 환경의 터전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을 때는 이 뜻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내적인 요인 가운데 그러한 환경을 하나님이 이미 제시해 주었다는 겁니다. 아담이 가는 길에는 이상적 가정이 허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가정이 가는 길에는 이상적 씨족이, 그리고 이상적 씨족이 가는 길에는 이상적 나라가, 그 나라가 가는 길에는 이상적 세계가, 자연적으로 기다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이상적 환경이 차원 높은 단계를 거쳐 가지고 발전을 해 나가면 나갈수록 그것은 막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이상의 터전을 맞을 수 있게끔 아담 해와 앞에 허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거꾸로 됐다는 거예요. 내가 가는 길에는 이상이 아니라 절망이 있습니다. 가정이면 가정이 가는 길에 씨족이 있으면 그 씨족이 가는 길에는 투쟁이 있는 것이요, 절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씨족이면 씨족이 가는 길에 국가가 있으면 그 국가는 악의 국가로서 이미 나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또, 국가가 가는 길에는 세계가 이미 반대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타락 전 아담과 타락 후의 인류는 이렇게 차이가 벌어진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을 때의 아담에게 있어서는 개인이 완성되면 가정이 기다리고 있고, 가정이 완성되면 씨족은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씨족은 자연적으로 국가, 세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원 높은 단계의 희망의 터전, 이상적 환경이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적으로 부여된 그런 환경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한 후에는 이상은커녕 실제에 있어서 전부가 반대되는 입장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가려 할 때는 그 개인 앞에 사탄이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벽을 무너뜨려야 됩니다. 아무리 개인이 승리했다 하더라도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싸움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종족을 찾는 데도 세계적인 싸움을 해야 됩니다. 전부 다 세계적인 싸움이라구요.

사탄이가 주체가 되어 가지고 그런 사람이 나와서 남아지는 날에는 자기의 모든 터전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개인이 나오면 사탄은 세계적인 반대를 합니다. 가정이 나와도 세계적이요. 씨족이 나와도 세계적이요, 국가가 나와도 세계적인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전세계적인 환경을 동원해 가지고 그렇게 대치해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뜻을 따라 나오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번번이 뜻길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에게 부여하였던 그 환경적 이념세계에 대한 것을 다시 어떻게 자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모질고 아무리 원수 악당들이 반대하고 투쟁이 벌어지더라도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사상기준이 확정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사회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미쳐지는 모든 악의 결과를 타개하고 남을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밀려 떨어져 나가 가지고는 복귀섭리의 완성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혹은 뜻을 대하고 있는 개인은‘이 세계에는 나만 남아 있고 이 세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하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이 신념을 안 가지고는 주체이신 하나님 앞에 환경을 대표한 상대적 존재로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내가 이 세계를 넘어서 타락하지 않은 이상적 아담의 이념을 나의 실체적 주체사상으로 세워 가지고 결의한 그 결의가 이 사망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이 되어 있지 않고는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번번이 실패하기 마련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환경을 어떻게 넘어가느냐. 어떻게 초월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길은 간단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적으로, 씨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이 철벽을 뚫고 나가야 된다, 이 장벽을 헤치고 나가야 된다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단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은 돌아가 가지고도 안 되는 거라구요. 날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날아가는 길밖에 없다구요. 어디로 갈 길이 없습니다. 날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입장에서 자기 혼자서 날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인간 혼자는 불가능하다구요. 하늘에서 끈을 내려 주든가 날아갈 수 있는 길, 초월적인 힘을 의지하든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 하는 말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그 나름대로 목적을 향하여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줄을 내려 주는 것입니다.

도주면 도주, 교주면 교주가 자기가 이상하는 어떤 곳에 가 가지고 그줄을 가져 와서 우리 앞에 내려 줄 것입니다. 그 줄을 내려서 감아 가지고 이것을 우리 앞으로 보내 줄 것입니다. 종교의 입장이 그런 입장이 아니냐. 그러므로 우리가 이 줄을 잡고 늘어져야만 우리가 어느 단계까지는 초월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생명시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 생활을 생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줄을 생명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줄, 이 줄을 생명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이걸 힘 있게 쥐어야 되느냐? 죽음보다도 강하게 쥐어야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안 그래요? 죽음보다도 강하게 붙들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것을 넘어서는 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 줄을 붙들고 발만 떼게 되면 저 피안(彼岸)의 세계까지 갈 수 있는 가망성이 있는 것입니다. 가면 갈수록, 멀리 뛰면 뛸수록 그 줄은 늘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조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왜 조정하느냐? 하나님이 직접적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상대적 환경을 통해 가지고 이것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상대적 환경을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느냐?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라구요.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이 탕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가피하게 그런 줄- 그 목적의 줄과 같은, 희망의 줄과 같은 그 줄은 창조 이상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을 내려 줘 가지고 그 줄이 미칠 수 있는 곳까지 하나님이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창조 이상의 인연을 따라서는 하나님이 그것을 관리할 수 있고 주관할 수 있기 때문에 그곳을 가려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줄을 내려 줄 수는 있지만 데려다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놀음을 하는 것이 신앙길이 아니냐. 마치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 내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뭐 불가피한 것입니다. 인간이 책임분담을 해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이 줄을 쥐는 데는 얼마만큼 힘차게 쥐느냐? 필사적으로 쥐어야 합니다. 필사적으로, 멍해 가지고는 안 된다구요. 죽는 것보다 더 강하게 쥐어야 됩니다. 죽는 것보다 더 강하게 쥐어야 사는 것입니다. 예수 같은 양반도 그런 것을 느꼈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고 한 것입니다. 살겠다고 그냥 가게 되면 원수에게 죽는 거라구요. 그냥 있다가는 그건 죽는거라구요. 그러나 죽고자 하고 생명을 각오해 가지고 가는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끌어당기는 데는 무엇이 끌어당기느냐? 끌어당기는 역할은 무엇이 하느냐? 그것은 저 미래의 소망, 타락하지 않은 아담 이상의 심정을 중심삼고 그리워하는 힘입니다. 이 힘이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끌어당기는 그것이 얼마만큼의 거리의 차이를 가져오느냐? 심정의 불일치점이 타락의 요인이 되었기 때문에, 심정일치가 못 된 것이 슬픔의 동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끌어당길 수 있는 그 주체적인 힘의 역할은 무엇이 할 것이냐? 밟아서 가 보게 할 수 있는,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을 무엇이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심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만큼 간절히 사모하느냐, 얼마만큼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투입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사랑하라! 그렇지 않아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이예요? 절대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따라서 그 심정 여하에 따라서 거리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